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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Jun 10. 2022

어찌 위를 보지 않을 수 있으랴?

"한 번 태어난 이상 인생의 정점은 찍어 봐야 하지 않겠나?"

커피조차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없었던 험한 직장생활을 종료하고, 집에서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누리고 있을 때였다. 걱정이 된 친구가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라고 물었고, 나는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세상과 동떨어진 대답을 했다. 인간의 오욕이 빠진 공간에서 최대한 순수하게 나의 길을 가고 싶은 바람이었다. 주변을 돌보며 살피고 함께 가는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누구를 밟고 올라서는 건 내 체질이 아니라고도 답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한번뿐인 인생, 자신이 갈 수 있는 최상까지는 가보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 아니겠느냐'라고 되물었다.  


고작 30년도 살아보지 않은 사회 초년생이 뭐 그리 지쳤기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당시의 나는 심한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사회적 지위와 재력 따위가  좋은 개살구, 허울 같은 부질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낮에 혼자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영화관을 가고 서점을 가서 맘껏 즐기다 오는 이 평화와 자유로움은 재력이나 지위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개인적 성취와 화려함을 위해 치열한 경쟁과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어차피 죽을 텐데 저리 아등바등 살아서 뭐해'라며 혀를 끌끌 찼다. '회사 밖은 더 위험하다!'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는 현대인의 불안감을 조성할 뿐 현실적 삶을 반영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당시 4년제 중상위권 대학 졸업자로 미혼인 나는 자연인으로 있어도 일주일에 과외 2~3개를 뛰어서 한 달을 운영할만한 용돈을 벌 수 있었다. 의식주를 해결하고 남는 돈으로는 소소하게 여행도 갈 수 있었다. 나는 돈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비싼 명품이나 옷이 아니어도 남 부끄럽지 않게 걸칠 수 있는 것이면 다.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손톱만큼 나오는 값비싼 디저트보단 적은 돈으로 장을 보고 만드는 기쁨을 누리며 정성스레 해 먹는 푸짐하고 건강한 요리가 더 큰 만족감을 주었다.


이후의 나의 생활은 그런 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게 전개되었다. 월급이 적은 계약직이었지만 근무시간이 적은 곳에 들어가 평일이나 주말에는 취미생활 하나쯤은 여유롭게 할 수 있는 일상을 보냈다. 변화와 경쟁이 적은 곳이라 능력 신장이 크게 되지는 않았지만, '뭐 괜찮다!' 싶었다. 정규직과의 여러 차별 요소도 큰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나는 정규직만큼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에, 나 스스로를 '직장의 신'의 비정규직이었던 김혜수를 떠올리며 지내니 자존감에 타격받을 일도 없었다.  


그러다 최근에 아이가 크고 학교라는 곳에 입학하면서 다시 '성장과 발전'이라는 화두에 직면했다. 학교가 단지 배우고 놀면 되는 곳 같으면서도 어떻게 보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연습의 장인 것도 같아서 매 순간 맘 졸이게 된다. 성적에 들어가지 않는 단원평가를 봐도 누가 몇 점을 맞는지 아는 것 같고, 성적과는 무관한 예체능(피아노, 미술, 수영, 자전거, 인라인 등)을 하면서는 누가 더 잘하는지 누가 무엇을 하는지 공개가 되다 보니 '경쟁과 비교'에서 초월한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


부모가 마음을 다잡고, 아이에게 내면의 기준을 세워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차라리 그것을 포기하고 남들보다 더 잘하게 되려 노력하는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마치 인간의 본능이며 사회에 만연된 분위기임을 안다.


나 역시도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거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건 놀이에서조차 싫고 재미없어 스포츠는 동계 올림픽 조차 안 보는 사람인데, 막상 나보다 뛰어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면 그 패배감이 생각보다 오래간다는 사실을 최근의 몇몇 사례에서 다시금 알게 됐다. 누구를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패배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일정 부분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보다 자신의 매력을 높이는 방법이 무언가를 잘 하는 방식으로 존재해왔다는 사실도.


내가 20대에 회사를 관두고 과외를 하면서 비교적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나의 학력이 과외가 가능한 중상위권 수준의 학력이었고, 그 학력을 얻기 위해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은 내가 초, 중, 고 11년 동안을 나름 치열하게 지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정규직이 아니고도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20대의 치열한 회사생활에서 얻은 일에 대한 내공 때문이라는 것을... 고급 레스토랑에 가거나 명품을 살 수 있는 사람들에 위축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고소득자인 남편을 뒀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의 스펙이 나의 자존감을 형성한다는 것은 주위에 있는 동네 아줌마들을 만나면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현재는 다들 전업주부일 뿐인 그들이지만 한때 나름 치열했던 과거를 거쳐 지금의 그들이 있는 것이다. 대화를 하면서 드러나는 서로의 자산에 알게 모르게 타격받는다. 그러니 어찌 인생을 아름답게 살수만 있으랴, 어찌 위를 보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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