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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Jun 15. 2022

인간이란 게 후진 건데...

얼마 전 남동생 결혼식이 있었다. 축의금 받는 역할을 한 신랑은 결혼식이 종료되자마자 "나 결혼할 때는 사람이 얼마나 왔었지?"라며 문득 자신의 하객수를 궁금해했다.


그리하여 살펴본 9년 전 우리의 축의금 명부. 신랑의 하객 수는 내 기준에선 생각보단 숫자가 많았다. 당시 대기업 과장이었던 신랑은 회사에서만 100명이 넘는 직원들과 50명이 넘는 친구들을 하객으로 맞이했다. 성취지향적이고 관계에는 무지 소홀해서 평소에 친구들과 안부도 묻지 않는 성향의 사람치고는 놀라운 숫자였다. 그는 이제까지 카톡 프로필에 그 어떤 사진조차 올려본 적이 없고, 자기 속 얘기를 밖에서 쉽게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일 친한 친구 아내의 임신 사실조차도 출산 소식을 통해서야 아는 사람이니 쏟은 관심에 비해 관계 효율이 꽤 높은 셈.


반면, 나의 하객 숫자는 그에 못 미치게 적었다. 당시 축의금을 받았던 남동생이 신랑 쪽과 비교된다며 민망해했고, 식권이 예상보다 50개나 남아돌자 그중 10개를 신랑 쪽에 준 것을 다행으로 여겼을 정도다. 부모님 지인을 뺀 내 지인은 겨우 27명 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나는 결혼을 핑계로 잠시 다니던 직장도 관뒀다. 친구들이 대개 출산이나 육아로 오기 힘들다는 34살 늦은 나이의 결혼식임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 수가 적었다. 나는 식이 끝난 후 남은 식권만큼의 어떤 배신감이나 절망감 같은 것에 시달렸다. 참담했다. 내 인생의 이제까지의 인간관계 성적표는 이 정도에 불과할 뿐인가?


물론, 못 올만한 각자의 사정들이 있었을 것이다. 중학교 절친은 며칠째 전화를 안 받더니 결혼식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서야 허겁지겁 "바쁜 일하느라 핸드폰을 꺼놓고 살았다. 못 가서 미안하다"라고 연락이 왔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청첩장을 주며 결혼 소식을 알렸던 과친구 세명은 출산과 육아로 오지 않았고(그중 한 명은 미안했는지 왔다고는 했는데, 확실한 증거가 없다), 고등학교 절친 또한 자기 딸의 돌잔치와 겹친다며 오지 않았다. 술을 샀던 대학 동아리 선배들도 주말에 육아와 일이 잡혔다며 거의 오지 않았다. 퇴직하면서 청첩장을 돌린 전 직장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준 술값이나 밥값은 아깝지 않았지만 내 기대와 관계에 대한 열망은 아까워서 쓰라릴 정도였다.


분명 나의 인간관계 효율이 높은 같지다. 감히 효율이라고 말할 상태도 못 된다. 돈으로 측정한다면 마이너스 상태다. 나는 신랑처럼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라면 적어도 일 년에 몇 번쯤은 연락을 하며 서로의 감정과 안부를 체크하고 사는 얘기를 나누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내 친구도 아닌 남편 아내 절친의 임신 사실을 남편보다 몇 개월 더 먼저 아는 '오지랖 넓은 유형'에 속했다. 하객수를 걱정하는 친구의 결혼식에는 나랑 가까운 이들을 회유해서 결혼식에 데려간 적이 몇 번 있을 정도다. (물론, 그 친구들은 내가 이랬던 속사정을 모를 거다.)


이외에 아마 결혼식에 참여하지 않았던 나의 수많은 관계의 공통적인 특징은 애매함이었을 것 같다. 나와 너무 뜨겁거나 너무 멀지도 않은 보통의 관계들. 가끔 만나서 밥과 술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지만,  진짜 나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나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혼을 한 이상은 더 이상 다가가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사회생활이 끝났을 테니 더 이상의 관계 진전이 안 될 것 같다고 여긴 사람들, 더 이상 내게서 득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


그러다가...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타인에게 관심과 정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정녕 타인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나. 내게 관심 없는 타인을 쉽게 제칠 줄 모르는 미련스러움,  타인과 정확한 소통을 해내지 못하는 눈치 없음, 타인을 다치게 하는 섬세하지 못한 말들,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무뚝뚝하고 까다로운 이미지, 문을 열어주면 용암처럼 흘러내릴 것 같은 과열된 자아, 쉽게 물들기 무서운 어두운 감성...


나의 대개의 관계들은 너무 가까워서 서 운하 다 말다 멀리하다 가깝게 하다를 반복하다 짓물러지고 뿌옇게 되는 관계들이 많은 것 같다. 서로 간에 있었던 스토리는 넘쳐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끈적지는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뭔가 유쾌한 스토리는 별로 없다. 아프고 구질하고 부끄러운 스토리들 투성이다. 차라리 신랑이 맺는 '가끔 한번 연락 오는 단비'같은 관계를 사람들은 더 선호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안 그래도 일상이 피곤한 사람들에게, 자기조차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복잡하고 다양한 스토리가 반겨질리야... 타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여유가 부족한 시대에 관계에 대한 지나친 이상을 품는 것이 얼마나 많은 절망과 배신을 예상하고 시작해야 되는 일인가 싶다.  


신랑에게 묻는다. "오빠는 친구를 믿어?" 신랑은 대답한다. "그럼. 믿지 못할 인성의 사람은 애초에 친구로 두지도 않지!" 나는 말한다. "난 그런 사람 보면 신기해. 끝까지 몰리면 인성까지 버리게 되는 게 인간인데,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데 인간을 믿는다고? 인간을 어떻게 믿지? 오빤 아직도 얼마나 인간이 후지고 나약한 지 모르는 거야?"  


신랑의 하객의 수는 나보다 월등히 많았다. 나는 그 이유가 사람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는 신랑 때문인지, 평소에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아 그만큼 사람들과 거슬릴 것도 적은 신랑 때문인지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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