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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Jul 01. 2022

태초부터 꿈꿔왔던 것

평생 한 가지 꿈만 꾸면서 사는 사람들도 드물겠지만, 나처럼 평생 갖가지의 꿈을 꾼 사람도 드물 것이다. 작가, 화가, 피아니스트, 건축가, 수학선생님, 정신과 의사, 기자, 논설위원 등...

 

나의 태초의 꿈은 7살 때 생겨났다. 그때만 해도 나는 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발산하는 스타일이 못됐다. 굉장히 숫기 없고, 순하고, 수줍음이 많았다. 마음속에 가득 차는 말들이 많았지만 누군가에게 발설할 수 없는 것들을 지니고 다녔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누군가는 내 기분을 온전히 이해 못 할 것이고, 어쩌면 나의 말들로 인해 기분이 나쁠 것이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마음속을 일기장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마음의 목소리로 읊조리는 버릇을 갖게 됐다. 그때가 엄마와 공장에 옷감을 가지러 버스를 타고 멀고 먼 길을 가며 생의 고단함을 어렴풋이 느꼈을 때부터였던가? 놀이터에서 소꿉놀이를 하던 중 짓궂은 남자아이들과 싸우던 때부터였을까? 엄마와 아빠가 싸우던 밤, 할머니 옆에서 불안에 벌벌 떨었던 때였을까? 초등학교 입학 후 지각해서 처음으로 선생님한테 혼나고 나서 나만의 비밀이 생겨났을 때부터였을까? 친구들과 무지개 동산에 올라가서 무지개를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을 느꼈을 때부터였을까? 그것이 분명하지는 않다.  


밤은 깊고 잠은 들어야 하는데, 낮잠을 잔 탓인지 잠이 오지 않는 밤들이 많았다. 그럴 때면 누워서 몇 시간 동안 갖가지 공상을 했다. 나는 나를 잠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 눈인 것 같아, 혼을 내듯 눈을 지그시 눌러보았다. 그러면 눈앞에 여러 모양의 선들이 엉켜서 복잡하고 기묘한 모양을 연출했다. 그 모양은 때로는 신비하기도 했고, 징그럽기도 했고, 아름답기도 하고 난해하기도 했다.  나는 그 모양들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는 넓고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고 직관적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나중에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를 상상해보곤 했다. 나는 주로 선이 예쁘고 상냥하고, 말도 생각도 행동도 멋지게 하는 아가씨의 모습을 그려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생각이 지겨워질 때쯤 나의 머릿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다. 저자가 '홍승희'로 적혀있는 어떤 두꺼운 양장본의 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노벨문학상을 타야겠어. 나는 왠지 노벨문학상을 타려고 태어난 아이 같아."  


하지만 그 뒤로 나의 꿈은 여러 번 바뀌었다. 그림을 그릴 땐 화가가 되고 싶었고, 번쩍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대회에 나갈 땐 피아니스트가 될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내 근본적 욕구를 채워주진 못하리란 느낌이 들었다. 작가의 꿈은 여전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가끔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고, 동네에 살고 엄마와도 예전부터 알고 지낸 담임선생님에게서는 "작가가 돼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방과 후 심심할 때의 나는 짧은 소설을 쓰며 시간을 보냈고, 그것을 에게 조심스레 보여주는 걸로 무료함을 달랬다.


고등학교 때는 수험생인 건 아랑곳하지 않고 문학동아리를 하는 친구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문과 쪽 진로를 선택한다는 것은 뭔지 모르게 비현실적이고 불분명했다. 나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전문직이 많은 이공계를 선택했다. 이과 쪽 학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집을 설계하는 것에는 꽤 관심이 있었던 것이 주효했다. 우리 집은 이사를 많이 다녔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방의 구조를 바꾸곤 했었다. 동생과 힘을 합쳐 침대와 책상을 이리저리로 옮겼다. 도서관에 가면 책장 속에서 각종 인테리어 책을 꺼내 살펴보며 공부의 피로를 달래곤 했다.


그러나 건축가가 되리란 나의 꿈은 수능을 본 후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전공보다는 학교의 네임벨류에 더 높은 가치를 뒀다. 그리고 결국 건축과가 아닌, 이학부에 지원했다. 특차전형에 덜컥 합격한 날 밤, 나는 교육대학원엘 가서 수학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7살 때의 어느 잠 안 오던 밤들과는 달랐다. 나는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위에 눌렸다.


그리고 나는 대학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학동아리에 가입했으며, 1여 년 간 적지 않은 방황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관심은 이과 쪽이 아니었다. 관심사와 재능의 방향이 반대라는 건 여러 고민을 동반한다. 나의 성적은 이과 쪽이 더 높았다. 나는 이학부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1학년을 마쳤다. 그리고 그 성적을 활용해 과 친구들 모르게 신방과로 전과 지원서를 냈다. 성격에 비추어보자면 나는 어쩌면 문과계열 중에서 철학과나 국문과 쪽이 더 맞았을지로 모른다. 하지만 현실적인 것을 늘 생각했던 나는 나의 내성적인 면이 극대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신방과 전과 합격통보를 받은 날 밤, 나는 신문기자가 되어 추후 논설위원이 되는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몇 년간 나는 언론사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학생기자, 신문부 학회활동, 언론사 스터디를 하며 20대 초반을 보냈다. 언론고시에서 수없이 고배를 마셨고, 운 좋게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간지에 들어갔지만 순탄하진 않았다.


인턴기자 생활은 사회 초년생인 내게 혹한의 경험이었다. 나는 나를 경계하는 계약직 사수와 신경전을 벌였고, 이어 옮긴 소규모 인터넷 신문사에선 박봉의 월급과 불투명한 미래로 다른 곳을 봐야 했다. 그리고 이어 운좋게 취직한 모 신문사의 건강 기자 생활도 순진한 애송이에게 만만치 않았다. 나는 온갖 수치스러움, 굴욕 등을 겪으며 그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 모범생으로 살면서 좀체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굽히지 않았던 내게 그 시절은 트라우마 같이 남아있다. 지금도 그 시절의 악몽은 꿈속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20대의 마지막 시기, 결국 나는 다 관두고 무작정 유럽여행을 떠나 나를 소비했다. 그리고 소비의 도시인 라스베이거스 어느 호텔 건물 앞에서 분수쇼를 볼 때였다. 나는 문득 '작가가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일사불란한 내 의식과 감정들은 어딘가에 써서 정리하거나 승화시키지 않으면 쉽사리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안의 어떤 응어리진 마음들을 풀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 어쩌면 나를 구원하고 해방할 것이 있으리라 본능적으로 여겼다. 그러면 어쩌면 나는 저 분수처럼 솟아오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후로 나는 글을 통해 돈을 버는 일들을 전전했고,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거나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며 줄곧 글쓰기와 가까운 삶을 살았다.


이제까지 나는 그 어떤 것도 '글쓰기'만큼 나를 본질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육체적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 통증이 없어지곤 하지만, 마음에 새겨진 아픔이나 엉킨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도 없어질 줄을 몰랐다. 그것들은 종종 꿈속이나 일상에서 불현듯 되살아나 그때의 그 시절로 나를 가게 하거나 일상에서 몇 번씩 정지하게 만든다. 나는 리와인드 되지 않는 정신을 원한다. 그다지 엉긴 것이 없어서 눈을 감으면 신비와 아름다움 정도의 환영만 떠오르던 7살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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