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향지 Jun 29. 2022

내 댓글이 간섭일까?

인스타 피드를 보다 보면 내 기준에서 거슬리는 것들이 몇몇 보인다.


하나는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배를 장난 삼아 때리며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를 귀엽다고 깔깔대는 어느 럽 아빠의 글이다. 저번에 퇴근하고 현관 물을 열 , 자신에게 베개를 던지던 아들의 모습이 재밌다고 올린 피드도 봐주기 어려웠는데 이번에는 그것보다 정도가 심한 것 같아서 글을 남겼다. "혼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피드에는 나 이외에 어떤 누구도 부정적 댓글을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권위를 던져버린 좋은 아빠라는 류의 긍정적 댓글이 수두룩했다. 내 생각이 의아한 것인가 싶어서 나는 주변 친구들에게 이에 대한 의견을 물어봤다. 답변은 한결같이 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뒤로 씹기만 했지 그 피드에 선뜻 나 같은 댓글을 달진 않을 것이란 얘길 해왔다. 육아에 정답은 없고, 삶의 방식은 다 제각각이란 이유였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이유는 타인의 삶에 그 정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먹성 좋은 두 딸을 키우는 엄마였다. 그녀는 피드에 '이보다 더 맛있을 순 없어 보이는 음식'을 거의 매 끼 손수 만들어서 올렸는데, 잘 먹어주는 딸들 덕에 재미가 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도 맛깔스러운 그 피드의 음식에 혹해서 팔로잉을 하고 몇몇 음식을 따라 하고 즐기는 기쁨을 누렸었는데, 어느 날 공개된 그 엄마의 딸들을 보고 나서 마냥 즐길 수가 없었다. 그 딸들은 비만의 정도가 심했다. '이보다 더 살이 찔 순 없을 것 같은 몸'이었던 것이다. 그 엄마 눈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겠지만, 내 지인은 그 딸의 사진을 보더니 그 손맛 좋은 엄마를 두고 "이건 학대야!"라는 거센 말을 내뱉었다. 먹이는 부분에서 그 엄마의 육아 효능감은 꽤 높았겠지만, 그 손맛이 아이들의 삶에 그다지 유익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놓고 말을 못 하고 "음식 너무 잘하시네요. 아이들이 이걸 다 먹었으면 저녁은 안 먹어도 되겠어요!"라는 댓글을 달았다.


나의 댓글은 분명 오지랖이긴 하다. 일단 피드를 올린 입장에서 보면 기분이 좋을 리도 없다. 그 사람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도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간섭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 간섭이라는 자체가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일에 부당하게 참견한다는 것인데, '부당하게'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은 도움인 경우도 많아서 번거로움을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은 도움을 준 다고 생각한다는 그것이 정말 도움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가만히 살펴보면 간섭을 하는 그 심리의 기저에는 자신의 콤플렉스나 허세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타인의 삶에 끼어든다는 것은 꽤 신중함을 필요로 한다. 타인이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여부와 그것이 정녕 도움이 될지, 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지, 나의 못난 심리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까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는 현실적으로 꽤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어렵다. 적지 않은 애정과 여유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에. 대개는 자신의 삶도 벅차다는 이유로 타인의 삶을 방조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 개인주의자는 이런 말도 서슴지 않는다. "나는 강에 빠져 죽겠다고 서 있는 사람도 말려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 사람의 결정권을 침해하는 행위니 까요."


하지만 그 많은 '부정적 댓글을 달지 않은  타당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내가 댓글을 단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면 유익함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이 한 번쯤은 나 같은 의견이 있다는 것 정도는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이 그 사람 육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내 댓글은 그 사람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단 애정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더욱 버릇없는 아이로 커가기 전에, 더욱 비만이어서 돌이킬 수 없기 전에 바로잡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외딴섬에서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살아간다. 너무나 다양한 세상에서 그건 가장 편한 방식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 시대의 상식으로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타인의 삶에 쉽사리 끼어드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불편한 눈초리를 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듯하다.


그렇다고 한들, 아직도 오지랖 넓은 나는 소소한 개인인 나 하나가 누군가에게 미칠 소소한 유익함의 가능성을 포기하진 못하겠다. 그리고 이 작은 가능성으로나마 망망대해에서 홀로 떠 있는 개별적인 섬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길 바란다. 쉽게 그 섬이 구조를 요청하거나 요청하러 다가가도록 말이다. 나는 내 섬에 쉽게 다리를 만들고 오는 누군가가 때론 불편하더라도 그것이 애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불편함을 넘어서 고마움을 표현하며 살아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누가 아줌마 앞에서 감히 우아함을 말하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