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시간의 나는 몇 번이고 밥딜런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쉬는 시간의 나는 좀처럼 이어폰을 끼지 않았다. 다시 그와의 대화가 끊기는 것도 불쾌했지만, 혹시라도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어쩌나... 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는 빌리는 것을 미루고 있던 세계문학전집 몇 권을 빌리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 눈길은 백석의 시와 전집쪽으로 향했다. 결국에 빌린 책은 백석 평전 세 권. 궁금증에 부리나케 책장을 펴서 창문 옆에 서서 읽고 있는데 창 너머에 익숙한 둘이 신경을 건드렸다. 이재 오빠와 선예였다. 선예는 뭔가를 따지듯이 묻고 있기도 했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오빠는 성가신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있는 듯도 보였다.
'둘 사이는 끝난 건가?' 하긴 나는 선예와 이재 오빠가 사귀게 된 과정을 자세히 듣지는 못했네. 물어보지 않았지. 나도 참... 질문을 못한 걸까?안한걸까?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이상하게도 증상이 약했다는 게 아쉬웠다. 심하면 차라리 아프다는 핑계로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밥 딜런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자율학습은 오늘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5시경의 하교길은 오랜만이다. 몇 달전까지만해도 동네 앞 편의점 알바를 하기 위해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뛰어나갔던 거리의 풍경과는 다른 것들이 보였다.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는 수 많은 학원 차량이 대기 중이었다. 우리 반에서 공부로는 내로라 하는 아이들이 다 다니는 유명 입시학원이었다. 그 차량에 소속되지 않은 아이들은 삼삼오오 무리지어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간혹 혼자 가고 있는 아이들도 보였는데, 혹시 예전의 나처럼 비밀 알바를 하러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처럼의 낯선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한낮의 공기는 뜨거웠는데, 저녁에 부는 바람은 선선했다. 공기의 밀도도 제법 다르다고 여겨졌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건가?
나도 모르게 밥딜런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Before they're allowed to be free?
Yes, and how many times can a man turn his head
Pretending he just doesn't see?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g in the wind
그때 얕은 어둠을 뚫고 광고 간판을 짐칸에 싣고 있던 트럭 한대가 정차했고, 잠시 후 정류장 앞에서 대기 중이던 학원 차량의 기사가 차량에서 내려 그 트럭의 기사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여기에 트럭을 세우면 어떡해요? 어서 빼세요!"
"당신네들은 여기에 왜 세우는데? 같이 밥벌이 하는 사람들끼리 아래 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러셔!"
"지금 곧 아이들 차 타러 몰려올 시간이라고요. 하필, 이 시간에 무슨 간판을 단다고.."
"아니, 내가 간판 다는데 뭐 보태준 거 있어? 이 양반이 보자보자 하니깐..."
트럭 기사는 운전석을 박차고 나와서 버스기사의 멱살을 잡기 시작했다. 학원 차량에 탑승하려다가 만 아이들이 그 장면을 막고 있는 바람에 누군지 제대로 잘 안보였지만 나는 목소리를 듣고 멱살잡이가 누군지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빠였다.
나는 그 장면으로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빠는 일방적으로 버스 기사를 가격하기 시작했다. 몇몇 정의감에 가득한 남자아이들이 달려들어 아빠를 말렸지만 허사였다. 오히려 내동댕이쳐졌다. 마음이라면 백만번이라도 달려가서 나도 그 남자아이들처럼 말렸을 것이다.
하지만 말린다고 말려질 아빠가 아니었다. 차라리 누가 경찰에 신고를 해줬더라면... 나는 핸드폰을 열어 112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기를 몇 번이고 망설이며 그 소란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 때 주먹 소리가 멈추고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다가온 것은.
"민진이? 너 민진이 아니냐?내 딸 김민진이 왜 여기에 있냐?"
거기에 나를 아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곧이어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 버스정류장에서 두 정거장쯤이나 뛰었을까?다 뛰고 나니 아까의 소란이 좀 사그라드는 듯했다. 어둠은 속도가 빨랐다. 이미 사방은 어둠으로 짙게 깔려있었다. 내 가 김민진이라고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나는 전등이 고장난 가로등 아래 서서 희안한 안도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