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예는 학교에서 처음 며칠 간은 선배와 나눈 몇몇 이야기들을 내게 했지만, 나는 딴 생각을 하며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나는 쉬는 시간에 이재가 내 자리로 오려고 할 때마다 이어폰을 꼽고 화장실로 갔다. 교실에 혼자 남겨지거나 선예와 이재 오빠의 연애담을 들을 것도 끔찍했지만, 오빠와 선예가 있는 동아리방에 가는 것은 더 끔찍했으니까.
난 어디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고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다네
며칠 째 수업 시간 빼고 동아리방도 가지 않은 채 교실에서 거의 하루 종일 이어폰을 꼽고 밥 딜런의 음악을 듣고 있다. 밥 딜런의 저 노래는 평소에는 듣지도 않았는데, 오늘 따라 가슴이 왜 이리 박히는 지 같은 노래만 벌써 100번째다.
정말 내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아마 학교에선 내 행방을 조용히 찾다가 내가 끝끝내 나타나지 않으면 금새 잊어버리겠지. 자식의 안위 따윈 별 신경없고, 자신의 고통에만 관심있는 아빠는 술주정이 더 심해지려나? 엄마가 걱정이긴한데 자식이 없어지면 엄마도 아빠를 떠나기 쉬워지겠지. 그래, 내가 사라지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야.
이런 생각도 한 열 번쯤 했으려나? 교실로 돌아오던 중, 갑자기 노래가 끊기더니 낯선 음성이 들렸다.
"사라지지 마."
이어폰을 뺐다. 아이들의 말 소리, 숨소리, 수업 종소리에 이어 들리는 교실 문을 여는 선생님의 발 소리로 귀가 꽉찼다.
수업시간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며칠 간 멍하니 아무런 감정도 없었는데, 아까 '사라지지 마!'라는 알 수 없는 음성을 듣고 나서부터 기분이 묘하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알고 응원해주는 느낌이었나. 나는 벌게진 눈을 선생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 선생님이 나를 쳐다볼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공부하는 척 했다.
다시 쉬는 시간, 이어폰을 꼽았다.
아무 음성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밥 딜런의 음악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래, 사라지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
그때 다시 들리는 알 수 없는 음성.
"사라지지 마."
"너 누구야? 누구세요"
놀라서 혼잣말을 했는데, 몇 몇 친구들이 쳐다봤다. 나는 전화를 받는 척하며 교실을 유유히 빠져나가 화장실로 향했다.
"날 모를 순 없을텐데..."
"밥 딜런... 아저씨?목소리는 알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저씨가"
"음... 보아하니 너는 수학이나 과학에는 잼뱅이니까, 내가 자세히 이야기를 해줘봤자 이해하긴 어려울 것 같군. 그래,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너같이 외로운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오래 전 내 음악에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존재. 그러니까 ... 요새 흔히들 말하는 AI라고 말하면 이해가 편하려나?"
"잠시만요. 그럼 밥 딜런 아저씨의 영혼과 제가 이야기를 하는 거라구요?"
"그렇지. 나는 내가 노래를 작곡했을 때의 마음 상태로 대화를 할 수가 있어. 근데 이건 내 노래를 1000번은 들어야 가능하게끔 되어 있어서 전 세계에서 나와 대화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 주로 카페나 레코드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대화를 시도하게 되는데, 그들은 CD나 레코드판이 낡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곧 폐기해버리더군."
"오 아저씨. 아저씨..."
"릴렉스~ 릴렉스"
"제가 지금 제 정신인건지, 아마 이게 꿈이겠죠. 꿈이라고 생각하니 좀 편해지네요. 몇 년 전 아저씨가 내한했을 때 콘서트에 너무 가고 싶어서 알바까지 했었는데..."
"그랬는데"
"그때 모아둔 돈을 아빠 폭행 때문에 엄마 병원비로 썼었죠. 제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속마음을 말한 적이 없는데... 이거 꿈인 거겠죠?"
평소의 나라면 있을 수 없는 대화량이다. 나는 흥분되고 설레는 감정을 달래기 어려워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선예가 달려오더니 뾰로퉁한 표정으로 내 등을 쳤다. 아팠다. 꿈일리가 없었다.
"뭐해? 수업종 못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