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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May 16. 2023

착각

불 꺼진 동아리방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어둠 속에 자신을 맡겨두었다. 내게 호의를 베풀던 이재 오빠의 모습과 내 손을 끌고 들어오던 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나는 한참을 울다가 수업 종소리를 듣고서야 눈물을 닦고 교실로 향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은 날이 계속되었다. 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엘 갔고, 쉬는 시간이면 밥 딜런의 음악을 듣고, 점심시간에는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와 동아리방에 와서 혼자 먹었다.  간혹 사물함이 찌그러져 있거나 책상에 성가신 낙서들이 있었지만 일일이 대응하고 싶지 않았다. 만사가 귀찮았다. 아이들은 처음엔 내 반응을 유심히 보는 듯했지만, 내가 시큰둥하니  시들해졌는지 더 이상 날 자극하지 않았다.


2학년 들어와서 보는 첫 중간고사는 흐지부지 지나갔다. 어느 날, 담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1학년보다 성적이 떨어졌네. 이대로 가면 인서울은 힘든 거 알지?"

"네"

"너 저번 진로희망계획서에 작가가 되고 싶다고 썼던데... 국문과를 가고 싶은 거니?"

"아무 과나 상관없을 거 같아요."


담임은 책상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너 저번에 본 국어 수행평가 말이야... 너 글 쓰는 걸 계속하면 좋을 것 같아."


내가 계속 무반응이자 담임은 외쳤다.

"김민진. 너 의지는 있는 거니?!! 얘가 만날 꿀 먹은 벙어리처럼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너랑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담임은 화가 나서 진로희망계획서를 책상 위에 내려쳤다.

"모르겠어요. 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게 있을까요? 선생님이 이러셔봤자, 제게 별다른 도움이 되진 않아요."

"어머, 얘 봐라"

담임과 나의 대화는 접점을 찾지 못했다. 몇 차례 담임의 고성이 오가자 교무실에 들렀다가 그 광경을 보던 이재 오빠가 그 광경을 목격하곤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알은 체도 하지 않고 종소리와 함께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점심시간마다 이재 오빠는 먹을 것을 사 갖고 동아리방으로 왔다. 어느 날은 본인이 보던 시집을 내밀었고, 자신이 쓴 시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시는 마치 사랑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쓴 연시였는데, 그걸 읽다 보면 나는 마치 내가 고백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떤 날은 고등학생 대상 글짓기 공모전을 내게 추천해주기도 했다.

"한 번 내보는 거 어때? 수상하면 대입도움된다더라. 그리고 내일 기말고사 끝나면 동아리 아이들과 노래방 가는 거다. 콜?"


이재 오빠가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는 죄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는 사연을 담은 곡이었다. 적극적 이어 보이는 그가 유독 저런류의 노래만 선택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가 노래를 부르며 절정 부분에서 나를 유심히 바라볼 때 나는 드디어 어떤 확신이 들었다. 저건 분명히 나에 대한 고백이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그와 집이 같은 방향이라도 되는 듯 짐짓 그의 뒤를 따라갔다.

"오빠, 저 할 말 있어요." 

그가 뒤를 돌아봤다.

"저도 오빠 좋아해요."


이재는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너도?"

"네"

"아니, 누가 나를 또 좋아해? 아니 혹시 너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널 이성적으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나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저번부터 그랬잖아요. 저랑 사귀고 싶다고..."

"아... 그게 그러니까... 그래, 이번엔 확실히 말할게. 선예처럼 또 멀어지긴 싫으니까."

그는 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널 여자로 생각한 적은 없어."

"여자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한테 사귀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내가 너랑 친해지고 싶다는 거지, 뭐, 남녀 간의 만남 이런 건 아니야."

"그럼 제게 보여준 시, 노래방에서 아까 부르던 노래들은 뭐였어요?"

이재 오빠는 어이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뭐긴, 그건 네 착각이지."

나는 부끄러움보다 그에 대한 증오나 경멸 같은 감정이 샘솟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덧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반면 한참을 웃던 그는 웃음을 멈추더니 차갑게 말했다.

"너같이 회피만 하는 은둔형 외톨이를 누가 여자로 좋아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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