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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향지 Jun 04. 2023

우린 승리하리라

 쉬는 시간만 되면 민진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주던 선예는 더 이상 민진에게 오지 않았다. 민진이 교실에서 어쩌다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피했다. 민진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이 모든 것이 불편해져 화장실을 가거나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그래도 불편함을 피할 수 없었다. 수업을 위해 교실로 들어면 책상 위에는 아이들이 흘려놓은 우유나 쓰레기들이 가득했다. 민진은 그것들을 치우다가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께 수업 준비를 늦게 한다며 혼나는 일이 았다. 저항하고 터뜨리는 것 대신 민진이 선택한 건 견디는 것이었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훗날에

'오, 마음 깊이 나는 믿네'

'우리 승리라리라, 훗날에'

    

하루를 간신히 버틴 민진은 밥 딜런의 'We shall overcome'을 부르며 핸드폰 수리점을 찾아갔다. 수리공은 몇 번이나 체크를 해봤지만 핸드폰의 이상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민진이 가져왔을 땐 배터리가 나간 상태이기만 해서 충전을 했더니 그대로 작동이 되더란 것이다.


'이상하다. 분명히 배터리가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는데...'

민진은 밥 딜런 아저씨와 다시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서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을 금세 잊었다. 민진은 이어폰을 꼽고 그의 노래를 작동했다. 하지만 재생시켜도 그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민진은 그날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밤이 되도록 그의 노래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방문을 여니 아빠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겹도록 익숙한 모습이었다. 민진은 못 본척 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요즘 주방일이 많다는 핑계로 아빠가 잠들고 나서야 들어오는 엄마 덕분에 안이 그나마 잠잠하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저 사람은 오늘도 술 먹다가 곯아떨어지겠지...' 민진은 생각했다. 민진은 방문을 잠그고 이어폰을 꼽고, 무의식적으로 백석의 전기에 손을 가져가다 말았다. '너같은 운둔형 외톨이를 누가 좋아하냐?'라는 이재 선배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너 새끼는... 아빠가 있는데도 인사도 안해. 야! 김민진!"

이어폰 너머로 문을 격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좀체 수그러들지 않자, 민진도 더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문을 열고, 민진은 아빠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방문 두드리지 마요.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민진이 방문을 다시 닫으려는데, 문 사이로 아빠의 팔이 들어왔다. 민진은 멱살을 잡혔고, 곧이어 아빠에게 머리를 세게 두드려맞았다.

아빠의 화풀이 상대가 자신이 될 줄 민진은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으나, 예상하고 그에 맞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요즘의 민진은 언제 터질지 몰랐다.


민진은 자신이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맞았고, 고통보단 희열이 솟구쳤다. 이제 '나는 아빠를 평생 증오해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동안은 아빠가 가끔 보여줬던 호의에 묻혀 '완전한 원망'이 불가능했었는데, 이제 뭔가 분명해진 느낌이다.


그 때 집에 들어온 엄마가 있는 힘껏 민진에게서 아빠를 떼어냈다. 그러다가 아빠의 공격상대가 엄마가 되자, 엄마는 평소와 달리 참지 않고, 아빠에게 달라들었다. 고성을 지르는 엄마의 입에선 술 냄새가 진하게 났다. 엄마는 급기야 아빠를 있는 힘껏 밀쳤다. 아빠의 몸이 던져진 곳은 잡동사니가 얽키설키 쌓여있는 장식장이었는데, 아빠의 몸이 너무 강력하게 밀쳐진 나머지 장식장이 쓰러져 유리가 와장창 쓰러지면서 아빠의 온 몸을 덮었다. 거기에 장식장 위에 놓여진 육중한 가방 더미가 아빠의 머리에 곤두박질쳤다.


눈 깜짝할사이 일어난 일에 엄마와 민진은 적잖이 놀랐지만, 가슴이 아프다거나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엄마는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멍하니 통과의례를 치루듯 구급차를 불렸다. 엄마가 호송되어 가고 민진이 참고인 자격으로 경찰차에 이끌려 후송되던 그 날 밤은 민진에게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뭐, 어차피 한 번은 치뤄야 될 일이라면 잊혀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민진은 이 모든 전쟁같은 상황 뒤에 평화가 올 것을 생각하며 입을 앙다물었다. 울지도 가슴 아파하지도 않을 거라고 결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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