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꿈글 May 08. 2016

넘사벽녀의 고백

#추억이 나에게 - 스쳐간 인연에게 고함


막상 이런 글을 쓰려고 보니 왠지 살짝 공주병 같기도 하고 도끼병 같기도 한 이 기분은 뭘까요?

훤한 대낮에 글을 시작했는데 영 감정이 살아나질 않고, 내 안의 소심한 그분이 자꾸 나오려 하셔서 잠시 접어두었다 야심한 밤에 다시 끄적여봅니다.


공주병이면 어떻고 도끼병이면 어때요. 내년이면 불혹인데 (아직 믿어지진 않지만) 그 전에 한 번쯤은 스쳐간 인연을 핑계 삼아 나도 소싯적에 한 인기 했었다고 잘난 척해 볼 수 있는 거잖아요.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 그러고 보면 갑기는 아니네요. 언제가 글을 쓴다면 이런 글을 꼭 한번 써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오늘 그분이 오셨군요.


어릴 적에는 건방지게도 '나'라는 사람을 좋아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초등학생이 "네가 나를 좋아해줘서 참 고마운데,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도 좀 징그럽긴 하네요.


 지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못생겼다고, 키가 작다고, 뚱뚱하다고, 공부를 못한다고 그 마음을 무시했던 거 미안합니다. 지금에 와서 감사하게도 나를 좋아해주었던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인연들에게 고마움 내지는 아쉬움을 전하고 싶은걸 보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봅니다.


불혹 不惑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래요. 곧 다가올 불혹이라는 나이가, 사전적 의미의 고상함이 사실 그리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이라는 말이 뭔가 비인간이고 감정이 무뎌진다는 뜻으로 느껴지는 건 기분탓인가요, 나만 그런가요?




짝사랑 마니아


그대들이 아는 것처럼 나의 대한 평가는 초등학교 때부터 '새침하고 똑 부러진다'로 요약됩니다. 근데 그게 뭐 의도적으로 새침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그 때문에 상처받았었다면 또 미안합니다.

  

근데 당신들이 넘사벽이라 생각했던 그때의 그 소녀가 사실은 감정표현에 서툰 부끄럼 쟁이, '짝사랑 마니아' 였던 사실을 알게 된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까요?


지금과는 다르게 우리가 어렸을 때는 좋아하는 고백 따위는 여자가 먼저 하면 큰일 나는 걸로 생각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뭐 큰일까지는 아니어도 '자존심 좀 세다' 하는 여학생들에게 흔한 일은 아니었지요.

물론 친구들 중에는 좋아하는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쓰거나 괜히 친구들에게 소문을 내서 그 친구의 귀에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녀들은 참 용기 있었네요. 이제와 그 용기가 살짝 부럽기도 합니다. 돌아보니 나는 감히 좋아한다는 말도 못 하여볼 만큼 도도한 '넘사벽녀' 는 커녕 단 한 번도 "나 네가 좋아"라고 먼저 말하지 못했던 불쌍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청춘이었네요.


넘사벽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의 준말. 주로 둘을 비교할 때 더 잘난 쪽의 잘남을 극도로 과장하기 위한 표현이다


부끄럽지만 고백을 해보려고 꽤 준비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끝내 하지 못한 고백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요. 다른 친구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거나, 당신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소문을 들었거나 (여기서 당신은 각각 다른 사람입니다만).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동창 친구에게 그 얘길 했더니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냐? 네가 가졌어야지."

훗. 가지다니요 뭘요? 사람 마음이 가지고 싶다고 가져지는 거던가요. 타고난 천성이 그런 건지, 다른 건 그렇게 욕심이 많은 난데 유독 사람 마음은 가지려고 애를 쓰지 않았던 건, 늘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나를 훨씬 좋아해주는 사람을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먼저 좋아했다가 상대방이 아니었을 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근데 글을 쓰다 보니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 때문에 지레 겁먹고 혼자 스멀스멀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두었던 내 마음이 살짝 불쌍해지네요. 후에 친구들을 통해 듣기로 그렇게 날 좋아했었다면서 제대로 고백 한번 해주지 그랬었요? 훗.



행복하자, 아프지말고


혈기왕성한 20대 때는 헤어진 누군가가, 어느 노래 가사처럼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다고 못된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누군가를 많이 좋아하고 사랑할 때의 행복과는 또 다른 행복을 느껴보니 알게 됐습니다.

상대방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수 있는 게 진짜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요.


어쩌면 그때의 그런 감정들 (누군가를 좋아하고 아파하고, 사랑이나 이별 노래 가사가 다 내 얘기 같았던)이 내 속에 오롯이 남아있기에 이런 글도 쓸 수 있으니 오히려 머리 숙여 감사해야겠습니다.

덕분에 어떤 이는 결혼과 출산, 육아에 찌들어 억척스러워진다, 우울하다, 나를 잃어간다 하는 와중에도 내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알고 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잃지 않고 나름 예쁘게 잘 살아가고 있어요.

제 동안유지 비법은 '사랑을 간직하고 사는 것' 이라고나 할까요?


어느곳에서 누구와 함께 있던, 누구의 품에 있건 진심으로 그대가 행복하길 바랍니다. 나 또한 그대가 행복을 빌어주는 만큼 많이 행복하려 합니다. 적어도 내가 좋아했던 그대라면 행복을 빌어주고 있는거지요?


P.S. 먼 훗날 머리가 희끗해지고 희끗해진 머리카락만큼이나 추억이 흐려졌을 때, 남자 여자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 생에서의 최고의 해피엔딩이 아닐까요?

   



편지
                                      김광진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하고 싶은 말하려 했던 말 이대로 다 남겨 두고서
혹시나 기대도 포기하려 하오 그대 부디 잘 지내시오
기나긴 그대 침묵을 이별로 받아 두겠소
행여 이맘 다칠까 근심은 접어두오
오오 사랑한 사람이여 더 이상 못 보아도
사실 그대 있음으로 힘겨운 날들을 견뎌왔음에 감사하오
좋은 사람 만나오 사는 동안 날 잊고 사시오
진정 행복하길 바라겠소 이 맘만 가져 가오


https://youtu.be/3SF0ASmivD8




매거진의 이전글 비, 아빠의 첫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