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나에게 -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오늘도 계속이다.
날씨 탓인지 다들 살짝 늦잠을 잔 탓에 부랴부랴 준비해 남편과 아이를 빗속으로 내보내고야 이렇게 끄적거릴 준비를 한다.
아주 폼나게 커피머신에 원두를 넣어 쓴 아메리카노를 한잔 내려 마시려고 하는데
'이런.. 하필 또 원두가 떨어졌냐.'
아쉬운 대로 믹스커피를 하나 타서 베란다에 나가니 후둑후둑 빗소리가 제법이다.
순간 누가 마흔이 다된 아줌마 아니랄까 봐 촉촉하게 젖어드는 소녀적 감성보다는 얼른 드는 생각이
'빨래를 해 놓길 잘했군. 후훗'
그러고 또 떠오른 생각..
'아빠는 또 그때 그 사람을 흥얼거리고 계시려나..'
비가 오면 생각나는 아빠의 그 사람
어릴 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내가 다닐 땐 국민학교) 시절의 나는 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치마를 즐겨 입었던 새침한 소녀는 비오는 날이면 하얀 스타킹에 튀는 흙탕물이 싫었고, 이유 없이 우울해지는 그 기분이 싫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 비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다 비를 추억하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빠가 흥얼거리시던 "그때 그 사람"이란 노래와 함께 촉촉하게 젖어있던 눈빛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꽤 반복된 기억이었던 듯하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비 오는 날, 알코올에 살짝 적셔진 아빠의 목소리는 어린 내가 듣기에도 무척이나 슬프게 들렸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땐 매번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지겹기도 했다.
"아우 아빠는 맨날 그 노래만 불러.
"허허~ 비가 오면 아빠가 첫사랑이 생각나서 그래."
"첫사랑? 그게 아직 기억이 난다고? 엄마~ 아빠가 첫사랑 생각난대~!"
그땐 어린 마음에 나와 엄마만 사랑해야 할 우리 아빠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기억을 슬프게 떠올린다게 괜히 기분이 나빴던 것 같다.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더니 정말 그런 건가. 언젠가는 갑자기 아빠의 첫사랑이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었지.
"아빠 첫사랑이 누구였는데? 이뻤어?"
"이뻤지. 눈이 크고.. 아빠 동네에 살았었는데.."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내가 추측해보건대 어쩌면 아빠의 기억은 그리 정확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눈이 컸는지 날씬했는지, 그녀가 아빠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땠는지, 어떻게 웃었는지.. 그저 아빠가 그리는, 기억하고 싶은 추억 속 그녀의 모습일 뿐.
아내라면 살짝 질투가 날만한 남편의 첫사랑 이야기에도 무심히 부추전을 자작하게 부쳐 내오셨던 엄마의 흐릿한 미소. 엄마도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 있었던 거겠지.
이미 흐릿한 과거가 되어버린 서로의 첫사랑은 '질투'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귀한 영역 같은 거였겠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얘기처럼 아름다웠던 기억 속 모습들은 그 시절,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것 같다.
잡티 투성이 얼굴도 매끈한 계란같이 바꿔주는 어플처럼 추억이라는 어플이 첫사랑을 뽀샵 처리해 주니까.
언제 내릴지 모르는, 내리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비처럼 알 수 없는 순간순간이 인생의 이벤트가 아닌가.
P.S 그 시절, 그 녀석들은 왜 그렇게 말이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