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꿈글 Aug 21. 2016

신 별주부전 《남편의 간》

#가족이 나에게 - 당신의 간은 내가 지킨다


아이가 잠든 늦은 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의 손에 들려진 비닐봉지 안에 캔맥주 3개가 들어있다.


"왔어? 힘들었지?"

"어.." (힘들긴 뭐가 힘들어. 우리 공주는? 이 아니고 어?)


평소답지 않게 단답형으로 짧게 끝나는 대답. 장난치기 좋아하는 남편이 지나치게 조용하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사슴 같은 그의 눈망울이 수상하다.


또 그 싸가지라고는 약에 쓰려고 찾으면 죽어라고 없는 개똥처럼,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차장의 지랄이 풍년이었던 모양이다. 아직 가을도 멀었는데..


"맥주 안주 뭐 있어?"

"음.. 뭐가 있을까? 오징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가장의 깊은 슬픔, 단순히 일이 힘듬에서 오는 피로가 아닌 되풀이되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


이런 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남편을 살살살 간질이며 그의 속에 쌓였을 음식물 쓰레기 같은 스트레스를 내 앞에서 다 토해내게 하는 일.

 그리곤 그 우라질 망할 ○○차장을 마른오징어에 이빨 나가도록 질겅질겅 함께 씹어주는 일. 

(그 시끼 오늘 귀 간지러워서 잠은 다 잤다!)


오랜 직장생활의 경험으로 나 또한 일 보다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타고난 순하디 순한, 선비 같은 예의바름으로 묵묵히 참고 견디는 그의 속이, 온갖 내장 기관들이 얼마나 썩어 문드러졌을지 다 들여다보임에도 매번 입으로만 질겅질겅 와그작와그작 그 인간을 누더기 만들며 위로 나부랭이를 해댔더랬다. 결국엔 '더러워도 어쩌겠냐. 참아야지' 라는 뻔한 엔딩멘트와 함께.


"그 인간은 위아래도 없어? 나이도 어린 주제에 낙하산으로 들어와서 버티는 게 아우 진짜!
 내가 그 인간 외근 나갈 때, 자기 회사 앞에서 복면 쓰고 기다리다가 확 발 걸어서 자빠뜨릴까?
 그냥 걸어가는 사람이 실수한 척하고 옷에다 뜨거운 커피를 확 쏟아버릴까?"

"그 인간 능력이 부족해서 아랫사람 괴롭히는 것 밖에 못하는 인간이야. 괜찮아. 너무 애쓰지 마. 고마워..
 내가 그래도 그 인간보다 능력있으니 다행이지. 나 이런 사람이야. 아무리 밟아봐라. 지가 나가지, 내가 나가나."

"자긴 언제부터 그리 착했나? 지켜주고 싶게."


그날 별주부전을 떠올린 건 남편의 피로 때문인지, 애써 참은 눈물 때문인지 모를 붉게 충혈된 눈을 보고나서 였을까.

어쩌면 우리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너무 힘들 짐을 혼자지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위한 희생을 '가장'이란 이름뒤에 숨기고 그의 간을 도려내어 꺼내두게 했는지도.

절대적인 '생계' 라는 권력앞에서 힘들어도 힘들다 말하지 못하고, 아닌 것을 아니다 말하지 못하는 그의 간을 차라리 숨겨두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결심했다. 남편의 간은 내가 지켜주기로! 토끼의 간을 지켜주는 별주부가 되기로!!






제 권유로 남편은 두 달 전부터 복싱을 배웁니다.

샌드백에 그 고마운(?) 인간 사진 하나 프린트해서 붙여놓고 실컷 치라했더니 그건 좀 웃기다며 그냥 상상하면서 치겠다네요.

그래서 진지하게, 웃음기 싹 빼고 얘기했습니다.




죽이고 싶게 한대 치고 싶은 날 있으면

옥상으로 조용히 불러서 한대 날려버려.

 합의금은 어떻게 마련해볼게

다 죽었어! (근데 진짜 때리는건 아니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