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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꿈글 May 11. 2016

변신하는 엄마는 늙지않는다

#꿈이 나에게 - 카멜레온이든 구미호든


오전 10시쯤, 군대는 안 갔지만 완전군장 같은 가방 하나를 힘겹게 매고 익숙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점점 빨라지는 걸음에 배낭여행용 백팩 속 물감, 팔레트, 붓, 오일들이 덜컹 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어제 오래간만에 동네 친구랑 안양역 지하 쇼핑몰을 휘젓고 다니느라 천근만근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도 콧노래가 흥얼거려지는 멋진 날씨!


해마다 봄이 오기 전엔 '봄이 오면 뭘 좀 배워볼까?'를 고민한다. 겨울잠을 자다 깨는 동물처럼 지루한 겨울방학을 버텨낸 엄마는 어떻게 놀아 볼까를 고민하는 거다. 태생이 무언가 배우는걸 좋아해 딸이 5살 무렵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취미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가 되어 이곳저곳을 서성거렸다. 물론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면 하게 될 일을 준비한다는 목적과 당위성으로.                 


사실 결혼 전 오랜 직장생활에 지쳐있기도 했었고, 우주에서 온 것만 같은 넘나 매력 넘치는 딸과의 일상이 싫지만은 않았지만, 나는 소위 참하게 살림에만 전념하는 '현모양처' 와는 거리가 멀었던 모양이다.

딸아이 머리를 직접 잘라주고 펌을 해 주겠다고 헤어과정도 수강했고, 늘 관심이 있었던 메이크업과 네일아트 자격증도 따기에 이르렀다.


아이가 어려 풀타임으로 일할수가 없어 파트타임으로 알바도 해보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 게, 나름 힘들게 일을 배워가는 과정에서도 이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의 이런 경험을 글로 쓸 일이 있을 거야'라고. (추후에 제 글에서 배움의 생생한 흔적들을 느끼실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찌 되었건 이번 봄엔 가까운 문화센터에 유화, 수채화 클래스를 신청했다. 무슨 그림에 일가견이라고 있냐고 물으신다며 그저 '그림을 좋아하는 소싯적에 그림 좀 잘 그리네, 소리 한 번쯤 들어봤던 여인'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림은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관심 있었던 분야였다. 글을 쓰느라 그림을 더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던 친정아빠의 영향인지 그림 관련 상도 받아본 적이 있다.

                                     

그까이꺼 내가 그려줄께

사실 갑자기 그림을 배우겠다 마음먹은 건 친정엄마의 말 한마디 때문이다. 엄마는 전원생활을 시작하신 후로 집으로 꾸미는 일에 애정을 쏟으셨다. 그러던 중


 "딸, 혹시 시간 되면 서울 가서 돌아다니다가 좀 화사한 그림 같은 거 있으면 좀 사라. 거실이 영 허전해서 안 되겠다. 알았지?"


"그림? 그거 내가 그려주면 안 되나?"


이렇게 시작해 유화를 배운지 3달이 다 되어간다.



미대언니 포스는 앞치마지!

우리 클래스에 들어서니 벌써 부지런한 언니들이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 꽃을 피우고 있다. 그림을 그려서인지 다들 참 포근하고 여유로운 인상의 여인들.

"안녕하세요!"

"어~ 왔어? 커피 마실래?"

이렇게 소소한 담소로 간단하게 대화도 나누며 미술도구들을 내어놓는다. 이 중 제일 좋아하는 것이 앞치마! 한때나마 동경했던 미대 언니 포스의 완성은 앞치마 아니겠어? 난 요리할 때 앞치마보다 그림 그릴 때 앞치마가 훨씬 좋더라. 적어도 그림 그릴 때 앞치마를 딱 입는 순간 나는 '화가'의 모습이니까.

취미가 직업이 되었을 때, 그 자체의 즐거움이 반감되는 것과 반대로, 내겐 아쉬움의 영역이었던 그림은 뒤늦게 엄청난 삶의 즐거움으로 찾아와 주었다.

원래 그림을 전공하셨다가 아이를 다 키우고 다시 시작하신 언니들의 실력은, 그저 친정집에 그릴 그림 하나 그려보자며 소박하게 시작했던 내게 큰 자극이 됐고 동기부여가 됐다. 많이 보는 것도 엄청나게 배우는 거라는 선생님 말씀대로 틈틈이 눈치껏 어깨너머로 언니들의 실력을 염탐하며 배우는 중이다.

아직 언니들의 정확한 나이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나와 띠동갑인 분도 계시고 (필자는 곧 불혹의 나이라고 여러 번 언급했으니 대충 가늠해보시길), 대충 다들 장성한 중, 고등학생 자녀들이 있는 걸 보면 10대 불장난으로 결혼에 이르지 않았고서야 알만한 나이시지만 그냥 봐서는 정말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들다. 이런 말하는 걸 알면 언니들은 긴 앞치마가 몸매를 가려줘서라고 할지 모르겠다. 평소 그녀들의 모습은 알길 없지만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그 순간만의 여유 있는 마음, 몰입하는 표정만은 그 어떤 아티스트도 부럽지 않다.

 


카멜레온? 구미호?

뭐 연기자만 이런저런 사람으로 변신해서 살아보란 법 있나? 백세 인생, 인생은 육십부터라고 치자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인 것을. 얼굴에 보톡스를 맞고 주름을 펴는 외향적인 변신은 오래가지 못한다. 깊은 내면의 자존감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카멜레온 같은 여자, 구미호 같은 여자? 어느 쪽이든 누가 내게 그런 변신의 캐릭터로 불러준다면 영광이겠다. 변화무쌍한 매력으로 누군가를 매료시킬 수 있다면 '파우스트'에서 처럼 영혼이라 팔겠다. (주변 친구들이 요즘 때 이른 '마흔 앓이'를 하는 중이다. )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지만, 그림을 그리는 나는 '화가' 가 된다. 글을 쓰는 나를 남편은 '김 작가' 라 불러준다. 그림 그리는 걸 아는 친구들은 '김화백'이라고 장난스레 불러준다. 말이 씨가 된다고, (원래는 좀 안 좋은 표현이지만) "야~ 아니야. 그냥 한번 해 보는 거야."라고 겸손을 떨지만, 이미 내 맘 속 꿈이라는 글자에 떨어진 불씨는 장난스러운 응원을 먹으며 야금야금 자라나고 있다.



지켜봐줘 엄마의 변신을

브런치 작가로 글을 쓰면서 일부러 딸에게 글을 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 번은 옆에서 조용히 지켜만 보더니, 잠시 저녁 준비를 하는 사이에 내 글에다 자기 글을 써 놓았더라. 항상 보던 엄마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보는 딸은 신기해하기도 하고 질문이 많다.

"엄마! 글 잘 쓰면 서점에서 엄마 책이 팔리는 거야?"

"(으음.. 그럴 확률은 글쎄..) 그럼! 엄마 책이 나오면 좋을 거 같아?"

"응! 그럼 엄마 책 표지에 그림은 내가 그려줄까? 나 그림 잘 그리잖아."

"(그래. 네가 표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나이까지 엄마가 버틸지 모르겠다만.. 끙) 맞네. 진짜 좋은 생각이네.

네가 꼭 그려줘~"

백번 책 읽어라, 글을 써라, 공부해라 틀어대는 엄마의 잔소리 라디오보다는, 행동하는 엄마 TV를 보여주겠다. 물론 선택은 아이의 몫이고,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만.


가끔 육아 관련 sns를 보면 안쓰러울 만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글들을 보게 된다. 나 역시도 비슷한 시기의 어려움을 경험했기에 (친정도 시댁도 지방이라 '독박 육아'를 몸소 경험한 일인) '그렇지 딱 힘들시기네. 내가 그맘 지알지' 하며 고개를 끄떡이면서도 엄마, 아내라는 말속에 자신을 숨기지 말라고, "변신할 수 있는 엄마, 아내가 돼라고. 꿈을 꾸라고" 고 말해주고 싶다. 거창한 꿈이 아니어도 좋다. 아니 거창한 꿈이어도 좋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하는 현실이라면, 그래도 나의 꿈과 함께하는 현실이라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이 밤, 아이가 잠든 사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끝없는 물음표를 날리는 그대들에게 '달빛요정 세일러문의 퐈이팅'을 보낸다. (마침 오늘은 초승달이 떴다ㅋㅋ)



김화백의 바다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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