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찌개를 함께 먹고 싶은 친구가 있다
친구야, 내일 오랜만에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비도 온다는데 뭐 뜨끈한 거 먹자.
개인적으로 벌여 놓은 일들이 있어 바쁜 척을 하고 다니다, 주절주절 수다가 그리워진 날이었다. 가을비 예보를 보고 부러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았다.
우리의 약속은 늘 뜬금없이 불쑥 이지만 성사율은 꽤 높은 편이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산다는 물리적인 거리의 가까움 보다는, 어떤 준비 없이 만나도 그저 편한 심리적인 편안함이 있어서다.
아이가 어릴 때 엄마들은, 아이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기도 하고, 결국엔 소원해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된다.
직장생활에서는 그 특수한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도 내 아이를 위해서든, 무언가를 위해 맺어야 하는 인간관계가 가끔 덧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가장 나이스 한 인간관계가 아이끼리 잘 맞으면서 얘기가 통하는 엄마와 친구가 되는 거라면, 나는 그런 면에서 꽤 운이 좋았다. 내게는 '비 오는 날 김치찌개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친구' 가 있다.
왜 하필 특별할 것 없는 흔해빠진 김치찌개냐, 그것도 비 오는 날.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애써 약속을 잡고 싶지 않은, 있던 약속도 취소하고픈, 뭘로 한 끼를 때우기는 해야겠고 혼자 꾸역꾸역 만들어 먹기는 살짝 우울하고 귀찮은 날.
습기 때문에 스타일 안 나오는 머리에, 그냥 헐렁한 가디건 하나 덜렁 걸치고 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메뉴가 김치찌개가 아닐까 한다.
칠칠맞지 못하게 벌건 김치국물이 튀어도, 먹다가 이 사이에 고춧가루로 불이 나도 '야! 너 2층에 불났어' 하며 깔깔거리며 얘기해 줄 수 있는 사이여야 가능한, 그녀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보글보글 김치찌개가 끓는다
우리의 수다도!
찌개가 눈 앞에서 끓여지는 걸 기다리는 동안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이, 어떤 이야기의 시작을 누가 먼저 꺼내도 대화가 끊이지 않을 수 있는 관계란 참 매력적이다. 듣기 좋은 말만 가려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너무 솔직한 듯한 충고도 깊은 애정과 배려가 밑바탕에 깔려있어 오해의 소지가 없다.
가까이 살면서 너무 오랜만이다, 그치?
기지배, 네가 바빠서 그렇지.
내가 원래 좀 바쁘게 사는 거 즐기잖아. 근데 너 못 본 사이 얼굴이 왜 이리 핼쓱하냐?
그래? 화장품을 바꿔서 그런가. 아, 나 이사하고 짐 정리한다고 그랬나 보다. 이사하고 어깨 아파서 침 맞으러 다니잖아.
야, 너 그 깔끔한 성격 좀 어떻게 해봐. 그래서 네가 피곤한 거 아냐. 적당히 못 본 척도 하고, 피곤하면 반찬도 좀 사다 먹고. 참, 어머님 아프신 건 좀 어때?
안 그래도 내가 우리 엄마 때문에 못 산다. 안 하셔도 될 일을 자꾸 그렇게 하신다. 병원비가 더 나오지.
어찌 보면 우리 둘의 성향은 완전히 다르다.
예민하고 세심하며 배려심이 깊어 여성 여성 한 친구에 비해, 나는 그다지 예민하지도 세심하지도 않다.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다소 냉정한 구석도 있다. 물건을 고르거나 일을 결정하는 선택의 순간에 친구는 고민이 많은 편이고, 나는 결단력이 있어 그 고민을 단칼에 해결해 주는 쪽이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긍정적이고 엄청 씩씩하다는 거? 뭐가 있으면 잘 나눠 먹는다는 거?
사실 둘 다 자존심이 엄청 강한 편이라 어지간히 힘든 일은 내색도 잘 안 하고, 있더라도 다 해결된 뒤에야 그냥 웃으며 얘기하는 편인데, 어느 순간 서로에게 만큼은 깊은 속 얘기를 하며 위로받는 우리는 '베프'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들 셋을 키우는 친구는 딸을 키우는 나를 부러워하고, 나는 듬직한 친구의 아들 셋을 가끔 부러워한다. 친구는 뭔가 결정해야 할 때 내게 물어오고, 손이 야무져 살림살이가 똑 부러지는 친구에게 나는 관련된 조언을 구한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으니, 어떨 땐 남편보다 낫다며 웃곤 한다.
음식의 맛은
함께하는 사람의 맛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간관계의 억지스러움에 신물이 나 살짝 내려놓은 적이 있었다. 그닥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 나도 모르게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걸 발견하면서 참 가식적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많다.
어느 섬에서 혼자 뚝 떨어져 살지 않는 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말하는 '가면'이라는 것도 쓸 필요가 있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가끔 따스한 밥 한 끼는,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닌,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김치찌개를 먹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사는 사실 메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김치찌개가 아니라 감자탕이면 어떻고, 순댓국이면 또 어떠랴.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가 메인 음식이고, 차곡차곡 쌓아왔던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반찬이 된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그저 그 시간 안의 대화들이 달게 꼭꼭 씹혀, 따스하게 또 하루를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
김치찌개를 배 터지게 먹고도 할 말이 남아,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주하고 앉은 우리는 또 한참을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당신의 인생도 꽤 행복한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