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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꿈글 Oct 27. 2016

음식 맛은 함께하는 사람의 맛

김치찌개를 함께 먹고 싶은 친구가 있다


친구야, 내일 오랜만에 점심이나 같이 먹을까? 비도 온다는데 뭐 뜨끈한 거 먹자.


개인적으로 벌여 놓은 일들이 있어 바쁜 척을 하고 다니다, 주절주절 수다가 그리워진 날이었다. 가을비 예보를 보고 부러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았다.

우리의 약속은 늘 뜬금없이 불쑥 이지만 성사율은 꽤 높은 편이다.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산다는 물리적인 거리의 가까움 보다는, 어떤 준비 없이 만나도 그저 편한 심리적인 편안함이 있어서다.


아이가 어릴  엄마들은, 아이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기도 하고, 결국엔 소원해지는 경우를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된다.


직장생활에서는 그 특수한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도 내 아이를 위해서든, 무언가를 위해 맺어야 하는 인간관계가 가끔 덧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가장 나이스 한 인간관계가 아이끼리 잘 맞으면서 얘기가 통하는 엄마와 친구가 되는 거라면, 나는 그런 면에서 꽤 운이 좋았다. 내게는 '비 오는 날 김치찌개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친구' 가 있다.


왜 하필 특별할 것 없는 흔해빠진 김치찌개냐, 그것도 비 오는 날.


특별한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애써 약속을 잡고 싶지 않은, 있던 약속도 취소하고픈, 뭘로 한 끼를 때우기는 해야겠고 혼자 꾸역꾸역 만들어 먹기는 살짝 우울하고 귀찮은 날.

습기 때문에 스타일 안 나오는 머리에, 그냥 헐렁한 가디건 하나 덜렁 걸치고 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메뉴가 김치찌개가 아닐까 한다.


칠칠맞지 못하게 벌건 김치국물이 튀어도, 먹다가 이 사이에 고춧가루로 불이 나도 '야! 너 2층에 불났어' 하며 깔깔거리며 얘기해 줄 수 있는 사이여야 가능한, 그녀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보글보글 김치찌개가 끓는다
우리의 수다도!


찌개가 눈 앞에서 끓여지는 걸 기다리는 동안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이, 어떤 이야기의 시작을 누가 먼저 꺼내도 대화가 끊이지 않을 수 있는 관계란 참 매력적이다. 듣기 좋은 말만 가려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너무 솔직한 듯한 충고도 깊은 애정과 배려가 밑바탕에 깔려있어 오해의 소지가 없다.


가까이 살면서 너무 오랜만이다, 그치?
기지배, 네가 바빠서 그렇지.
내가 원래 좀 바쁘게 사는 거 즐기잖아. 근데 너 못 본 사이 얼굴이 왜 이리 핼쓱하냐?
그래? 화장품을 바꿔서 그런가. 아, 나 이사하고 짐 정리한다고 그랬나 보다. 이사하고 어깨 아파서 침 맞으러 다니잖아.
야, 너 그 깔끔한 성격 좀 어떻게 해봐. 그래서 네가 피곤한 거 아냐. 적당히 못 본 척도 하고, 피곤하면 반찬도 좀 사다 먹고. 참, 어머님 아프신 건 좀 어때?
안 그래도 내가 우리 엄마 때문에 못 산다. 안 하셔도 될 일을 자꾸 그렇게 하신다. 병원비가 더 나오지.


김치찌개가 끓는 동안, 꾹꾹 눌러져 있던 우리의 수다가 끓고도 넘친다.




어찌 보면 우리 둘의 성향은 완전히 다르다.

예민하고 세심하며 배려심이 깊어 여성 여성 한 친구에 비해, 나는 그다지 예민하지도 세심하지도 않다.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다소 냉정한 구석도 있다. 물건을 고르거나 일을 결정하는 선택의 순간에 친구는 고민이 많은 편이고, 나는 결단력이 있어 그 고민을 단칼에 해결해 주는 쪽이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긍정적이고 엄청 씩씩하다는 거? 뭐가 있으면 잘 나눠 먹는다는 거?


사실 둘 다 자존심이 엄청 강한 편이라 어지간히 힘든 일은 내색도 잘 안 하고, 있더라도 다 해결된 뒤에야 그냥 웃으며 얘기하는 편인데, 어느 순간 서로에게 만큼은 깊은 속 얘기를 하며 위로받는 우리는 '베프'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다.


아들 셋을 키우는 친구는 딸을 키우는 나를 부러워하고, 나는 듬직한 친구의 아들 셋을 가끔 부러워한다. 친구는 뭔가 결정해야 할 때 내게 물어오고, 손이 야무져 살림살이가 똑 부러지는 친구에게 나는 관련된 조언을 구한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으니, 어떨 땐 남편보다 낫다며 웃곤 한다.





음식의 맛은
함께하는 사람의 맛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간관계의 억지스러움에 신물이 나 살짝 내려놓은 적이 있었다. 그닥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 나도 모르게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걸 발견하면서 참 가식적이라는 생각을 한 적도 많다.

어느 섬에서 혼자 뚝 떨어져 살지 않는 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말하는 '가면'이라는 것도 쓸 필요가 있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가끔 따스한 밥 한 끼는,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닌,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김치찌개를 먹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사는 사실 메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김치찌개가 아니라 감자탕이면 어떻고, 순댓국이면 또 어떠랴.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가 메인 음식이고, 차곡차곡 쌓아왔던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반찬이 된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그저 그 시간 안의 대화들이 달게 꼭꼭 씹혀, 따스하게 또 하루를 살아가는 에너지가 된다.


너랑 마시는 커피가 젤 달다 친구야~



김치찌개를 배 터지게 먹고도 할 말이 남아,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주하고 앉은 우리는 또 한참을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당신의 인생도 꽤 행복한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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