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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꿈글 Apr 26. 2016

오이야 친하게 지내자!

여름이 다가오면 아줌마는 괴롭다


그의 시선

얼마 전부터 남편의 시선이 자꾸 내 복부를 따라오고 있음을 느꼈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며칠이 그렇게 흐른 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요즘 살이 좀 찐 거 같은데? 전체적으로 덩치가 좋아진 거 같아. 운동 좀 해. 곧 여름이잖아."


그럼 그렇지, 그거였어. 그 얘기 왜 안 하나 했다. 이렇게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10년씩이나 같이 산 아내의 몸매 관리를 위해 독설을 아끼지 않으시는 나의 신랑님은 태생이 마른 체형으로 지금까지 살이 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시어머님 말씀으로 어릴 때부터 편식도 심하고 양도 적고 돌아다니기는 또 엄청 돌아다녔다나? 심지어 잠도 없다. 야채와 과일을 좋아하고(특히, 사과를 좋아해서 내가 백설 왕자냐며) 밥을 한 공기 이상 먹지 않는다.


근데 난? 태생이 통통한 체형으로 지금까지 빠짝 말라본 적이 없다고 한다. 울 엄마 말씀으론 어릴 때부터 고기와 밥을 유독 좋아했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집순이에다가 잠이 많았단다. 야채와 과일은 굳이 먹으라고 주면 겨우 한두 조각 먹다 말고 밥은 기본이 한 공기, 그 이상도 가능했다.


타고난 건강체질에 아파도 웬만하여서 입맛이 떨어지지 않는 부모님 입장에서 잔병치레가 없어 보험료가 아까운 효녀 중에 효녀였다고.


그래도 다행히 삼시세끼 이외에 군것질은 하지 않아서 아가씨 때 까지는 꽤 볼만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뭐 아가씨 때 한 날씬 안 한 사람이 있겠냐마는 유독 잘록한 허리 덕분에 원피스가 꽤나 잘 어울렸고,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던 울 신랑님 눈에 낙점되어 결혼에 이르렀는데...


사이즈가 달라졌다

자기관리가 철저하시고 살이 좀 찔만하면 어김없이 한소리 해주시는 신랑 덕에 딸아이를 낳고도 한동안은 55 사이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37세가 되던 해부터 옆구리를 시작으로 스멀스멀 군살이 붙기 시작하더니 겨울이라 춥다고 혹은 여름이라 덥다고 운동을 조금만 소홀히 하면 옷 사이즈가 달라지는 게 아닌가.

'어허 이게 나잇살이라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이미 66 사이즈 옷을 주문하는 상황이었고, 옆구리와 배 쪽 살들이 유독 반항하기 시작했다. 최근엔 원래 좋아했던 그림을 취미로 삼아 화실을 다니면서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그 와중에 먹는 양을 줄이지 않아서인지 신랑이 드디어 최후통첩을 한 거다.


사실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하루가 멀다 하고 SNS에는 정말 취미인지 직업인지 군살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여인네들이 복근 사진을 쉴 새 없이 올려대는 시대에 이 아줌마도 자극을 받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현실과는 꽤 동떨어진 이상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게 문제지만. 어흑ㅠㅠ


오이 먹을래?

어쨌거나 여름도 다가오고 굶는 다이어트, 연예인 식단 따위는 도저히 못 따라 하겠고 저녁을 6시 이전에 평소 양보다 절반으로 줄이는 걸로 시작은 했으나 딸아이를 재우고 TV를 보던 밤 10시쯤 미친 듯이 허기가 밀려왔다.

다른 걸 먹으려고 하면 분명 신랑이 폭풍 잔소리를 할 테고 참을 수 없는 허기에 짜증이 날 때쯤 지난 아파트 시장 열릴 때 사다 놓은 오이 한 단이 생각났다.


"자기야 안 출출해? 난 저녁을 좀 적게 일찍 먹었더니 출출하네. 오이 먹을래?"


평소보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물어보니


"어? 내가 좋아하는 오이! 오이는 살도 안 찌고 좋지. 같이 먹자."


오이 3개 껍질을 벗겨 적당히 잘라먹는데, 오이가 이렇게 맛있었나?

시장이 반찬이라고 아삭한 식감과 향긋한 수분감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나는 그렇게 허기를 채운 뒤 꿀잠을 잘 수 있었다.


언젠가 더 늦기 전에 몸매 관리하라고 닦달(?)하는 신랑한테 스트레스 받는다고 신경 좀 그랬더니


"나이 들어서도 서로 관리 잘하고 그래야 사랑이 식지 않지. 나는 뭐 회사 갔다 오고 피곤한데 괜히 운동하냐? 너랑 우리 딸한테 멋진 모습 보여주려고 그러지. 무관심해지기 시작하면 다 의미 없는 거야. 복부비만 건강에 나쁘다잖아. 오래오래 사랑하며 살자고."


솔직히 40세가 가까워오니 운동을 해도 예전처럼 쉽게 살이 빠지지 않는 게 사실이라 식단 조절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이제 허기질 땐 냉장고 가득한 오이를 잘근잘근 베어 물으며 여름을 준비해야겠다.


오이야~ 친하게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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