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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Jan 16. 2016

사랑의 의무를 주장하다

영화 <퍼펙트 센스>

  완전한 감각에 대해 묻는 일은 감각에 완전한 영역과 불완전한 영역이 있다고 구분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당최 그게 무슨 의미인가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사실 감각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교양이 말해주고 있고, 이러한 선행 개념을 바탕으로 정의되는 '감각의 불완전성'은 다시 개별 감각의 부분성을 우회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해도 '∑(개별 감각)=완전한 감각'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개별 감각의 합은 그저 총량일 뿐이다). 이로부터 견지할 수 있는 사실 한 가지는, 특정한 감각 하나가 소실된다고 해도 인간이 삶에서 감각 자체를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논의를 좀 더 좁혀보면 오감 중 어느 것이 없다고 해도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흔히 그것은 '장애'로 분류되지만, 그 역시 생명의 불능을 뜻하지 않는다.
 
  이렇듯 <퍼펙트 센스>는 감각의 파편적 측면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life goes on'이라고 지속적으로 되뇌이며 주제를 단순화시키는 듯하지만 이는 영화의 일부분일 뿐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여러 가지 설정을 감행했는데, 단선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으면 조성된 테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개별 서사들이야 영화를 직접 보고 알 일이고, 따라서 나는 이 영화의 서사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가지고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1. 어느 날 갑자기 인류는 질병-과연 질병인지는 알 수 없다-으로 인해 감각을 하나씩 잃어간다. 이 사실 자체가 말이 되든 안 되든 그것은 감독이 상상한 사건이므로 용인할 수 있다. 특정한 전염의 조건이 없이 거의 동시적으로 인류 공통에게 일어나는 이 현상은 '후각-미각-청각-시각' (영화 속 서사에서 촉각은 (적어도 아직은) 사라지지 않는다)의 순서를 보인다. 순서 자체는 과학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중요도 순서인 듯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어째서 감각이 사라지느냐, 혹은 어째서 이런 순서로 감각이 사라지느냐가 아니라, 어째서 이런 증상을 보인 후에 이런 감각이 사라지느냐이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감각의 소실은 감각에 따라 특정한 증상을 보인 후에 발생한다. 이 증상들은 개별 서사에는 영향을 미치나 영화 자체의 틀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껴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감독이 자연스럽게 관객들에게 자유롭게 해석하기를 요구하는데, 덕분에 보고 난 후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나와 같은 관객의 몫일 테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후각은 깊은 슬픔이 밀려와 한참을 울며 괴로워한 후에 사라진다. 그 다음으로 사라지는 미각은 참을 수 없는 허기가 일어 구강과 식도를 넘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다가 사라진다. 이후 청각은 광기 어린 분노가 터져나와 폭력, 폭언을 행하고 때려부수는 등의 파괴성을 극도로 이끌어낸 뒤 사라지고, 시각은 삶에 대한 안도와 행복, 사랑과 감사가 우러나온 뒤에 사라진다. 각 증상이 각 감각과 어떤 의도로 연결되어 있는지, 솔직히 기준을 잘 모르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역시나 개인의 자유에 맡길 수밖에. 결국 이 궁금증을 미해결로 놔둔 채 영화를 재검토하면 그 다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물이다.
 

2. 영화의 주인공은 수잔과 마이클 두 남녀이다(내가 좋아하는 에바 그린과 이완 맥그리거다, 라는 건 사족). 두 사람은 일련의 공통점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영화 전반에서 굉장히 대조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러한 설정은 영화가 조건지어준 사건과 상황에 접근하는 데 있어 유의미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먼저 수잔은 항상 나쁜 남자를 만나 상처받기 일쑤인, 전염병 연구원이다. 그녀는 여린 성격이지만 이성적이고 시니컬한 태도로 무장하고 있는데, 전염병 연구원이라는 직업으로 인해 이 질병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장 침착한 태도를 유지한다. 자가용을 몰고, 침을 자주 뱉는다. 식이장애를 심하게 앓은 적이 있으며 그로 인해 불임이지만, 일 때문에 출산과 육아에 관심이 없는 척한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언니와 함께 해안가에 나가 돌을 던진다.
  마이클은 오감을 가장 예민하게 사용하는 직업 중 하나인 셰프이다. 따라서 감각의 상실을 생업의 현장에서 피부로 체감한다. 다른 사람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없는 유별난 성격의 소유자이며, 때문에 하룻밤 잠자리를 함께한 여성을 누운지 얼마 되지도 않아 미련 없이 내보내는 나쁜 남자이다. 활달하고 감정적인 그는 전에 만난 여자친구 일로 안고 있는 죄의식을 떨쳐내지 못했다. 자전거를 애용하고, 의외로 삶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정말 맞지 않다. 그래, 맞고 안 맞고는 사랑의 적합성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러한 둘의 모습은 여러 보통의 주변인들 사이에서 도드라져 특정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유형을 보게 한다. 수잔은 자신에게 어떤 증상이 찾아올 때에도 눈빛과 표정에서 그것이 또다른 감각의 상실을 암시하는 신호임을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최대한 합리적으로 질병의 추이를 가늠하는 그녀와 반대로 마이클은 통제 불가능한 상실의 순간에 그대로 빠져든다. 청각을 상실하기 직전 수잔의 치부를 동원해 그녀를 인신공격하는 일종의 본능에 그대로 노출되며, 이후에 눈물로 사과한다. 매 상실의 사건마다 레스토랑의 폐업을 걱정하는 사장에게 긍정의 메시지를 말한다. 처음부터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룰 작정인 영화는 당연히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둘이 왜 사랑에 빠지는지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모습과 둘의 사랑 자체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다른 두 사람**은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변화하고, 결과적으로는 사랑을 통해서 그 간극을 극복할 수 있다(당연히, 마이클은 수잔과는 한 침대에서 잔다).

  

3. 영화가 되뇌이듯 삶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감각이 하나 사라질 때마다 직면한 상황에 적응해나가고 변화된 방식으로 삶을 살아낸다. 그렇지만 영화가 주지시켜주듯 이런 사람들은 하나의 부류이다. 세기말적인 이 상황을 으레 세기말적으로 파괴와 혼돈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다른 한쪽에 존재한다. 수잔과 마이클은 전자에 속한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냐고? '그래도 삶을 계속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를 뜻한다.

  영화가 도입부에 말한 문장을 봉합하면서 형식상 충실한 마무리를 맺고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빛이 있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 ......로 차례차례 미시화되는 도입부의 문장은 세계의 구성을 알려준다. 세계의 선행 조건은 빛이다("빛이 있으라"). 그리고 생육하는 생명의 핵심은 남자와 여자이다. 이처럼 영화는 크게 보면 세계의 근본적인 부분부터 차례로 내려간 뒤, 감각의 소실에 따라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오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결국 결말에서 인간은 시각을 상실하고 빛은 사라진다.

  그렇지만 도입부의 역순으로 갈무리되는 결말은 한 가지를 건너뛴다. 바로 '남자와 여자'이다. 삶의 근간인 빛을 잃어도 남자와 여자는 남아서, 삶을 계속해나간다. 앞서 말했듯 그것은 사랑 때문인데, 이 영화가 순수한 낭만을 노래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좀 더 정치한 생각이 요구된다. 감각의 상실을 통해 인간이 상실하는 빛은 실제의 빛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보는 세계에서의 빛을 잃는다. 인식은 주관적이고 자신이 빛을 볼 수 없다면 빛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 있으나, 이를 통해 세계가 끝장나도 사랑은 남는다 라는 식으로 해석하면(그렇다고 해도 개인의 자유니 어쩔 수 없으나) 역시 단순한 결론이 아닐까. 이보다는 사랑은 감각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실제로 여전히 존재하지만 더 이상 빛이 아니게 된 빛으로부터 온전성을 독립시킨다고 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영화는 아마도 '완전한 감각 = 사랑'의 도식을 참으로 여기고 있는데, 그 관점에 의거할 때 후각, 미각, 청각, 시각이 없어도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있다면 삶은 흩어지지 않는다. 영화가 '생의 긍정'을 주제로 삼기보다는 사랑에 대해 지속적으로 환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로부터 뒷받침된다.
 

4.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남을 것이다. 영화의 관점에 의거할 때 촉각이 사라지면 사랑이고 뭐고 다 불가능한 것 아닌가? 나도 그 점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국 사랑(완전한 감각)이라는 것은 대상을 감각함을 전제로 하고 있어, 영화에서는 적어도 서로를 만지고 느낌으로써 삶을 해체하지 않고 계속해서 온전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으나, 아무 감각도 없이 보이지 않는 진공의 대상을 인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단순히 관념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베를린(맞나?)에서 태어났다는 오감이 온전한 아이는 사랑이라는 완전한 감각의 결과인데, 수잔의 발상과는 달리 항체 추출은 애초부터 불가능했겠지만(영화의 사건이 질병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나부터가 단어 선택에서 의도하고 있듯 그것은 현상에 가깝다), 처음부터 관념만이 주어진 세계에서는 어떤 대상을 그렇게 사랑하는 일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사랑의 최소 전제 내지는 최후의 보루를 촉각으로 삼는 듯한 영화의 관점은 그래서 개운하지 않다.

 



  하지만 서두에 언급했듯 어떤 감각이 없다는 것은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영화가 현상을 소수의 일로 한정하지 않고 지구 전체의 일로 상정하고 있는 덕분에 이 사실은 특수한 상황('장애'를 고려할 때와 유사한 성격의)이 아니라 일상의 것으로 호출된다. 추상적인 논의 말고 눈 앞의 현실로 와보자. 장애인들 간의 사랑도 우리는 사회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한다.*** 장벽을 극복하는 사랑은 더 아름답게 여기는 현실을 살면서 막상 인간은 사랑을 현실 안의 것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결말에서 수잔은 서로 만지고 눈물을 느끼는 모습을 남들이 보면 보통의 커플일 것이라고 말한다. 인류가 한 남자와 한 여자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One for all은 동시에 All for one이다. 사랑이라는 세계의 근간-이 시점에서 나는 영화의 관점에 일부 동조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사랑을 세계의 근간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이의 배경에는 내 가치관의 바탕인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밝혀둔다-을 나누는 관계는 감각이라는 부분의 소실로 인해 훼손될 수 없다. 사랑은 불완전한 감각들과 달리 유일하게 현실의 바깥으로 넘어서는 완전한 감각이다. 사랑의 순간은 삶을 계속하게 하는 빛나는 순간이다. 지금 여기에서 누군가와 누군가의 사랑이 세계를 지속시킨다. 아마도 그렇게, 사랑은 의무이다.

 


*
촉각을 제외하고 상실되는 감각들을 보면,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 인간의 인지 과정에 작용하는 감각의 비중 등을 고려할 때 영화 속에서 소실된 순서의 역순으로 중요도가 높다. 이에 대해서도 그런 중요도와 별개로 나름의 규칙을 가졌을 가능성을 타진하면 후술할 내용과 함께 매우 복잡해진다.

 

**
영화는 심지어 카메라워크에서도 둘 사이에 차이를 둔다. 침착한 성격에 자동차를 이용하는 수잔을 잡을 때는 평형이 흐트러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잡아주는 반면, 마이클의 경우에는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 카메라를 자전거에 달아놓아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격한 흔들림을 갖게 하고, 평소에도 사소한 진동을 굳이 통제하지 않고 그를 잡아준다. 이쯤 되면 영화를 안 본 사람도 짐작할 수 있지만 마이클이 수잔과 함께 있을 때 카메라는 수잔에 기준을 두고 얌전하다.

 

***
정용준 작가의 <떠떠떠, 떠>를 떠올리게 한다.
  

사족 - 이렇게 극단적인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남녀 간의 연애의 정당성을 깊은 곳에서부터 길어 올리는 매력적인 멜로 영화가 얼마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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