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독다독 Nov 15. 2017

제주 드리밍

캘리포니아 드리밍의 후일담들(에 대해 생각하는 척 하기)

  그런 논의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산이라는 표상이 가지는 특정한 이미지나 서사성을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려는. 주지의 사실이지만 부산을 배경으로 하는 컨텐츠는 많다. 매체의 친숙함을 고려해 영상물로 한정하면 더듬어 이름을 댈 수 있는 드라마, 영화가 수두룩하다. 이런 현상에는 결과론적으로 여러 말을 보탤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것들. 서울·경기 중심의 문화권이 지방, 특히나 부산에 가지는 일종의 환상이 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의 보이지 않는 주도권이 특정한 모습으로 부산을 재현하려는 문화-정치적 기획이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부산의 성장과 그 상업적 성공이 만들어낸 고유한 영향력이 있고, 그것을 대중문화에 기입하려는 누군가의 욕망이 있다. 여기에 더해 경상도와 남성, 그리고 정치경제적 권력을 매듭으로 묶어보는 상상도 가능할 것이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다. 이 중 어떤 요소가 핵심적인지를 가려보는 일은 큰 의미가 없다. 저런 맥락들이 부산이라는 로컬리티와 교차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시간이 흐른 뒤, 그러니까 이삼십 년 정도 지난 뒤‘2010년대적’인 것을 재현하는 컨텐츠를 만들 때, 누군가는 배경을 제주로 선택할지도 모른다. 토착성 이야기가 아니다. 왜 부산이 재현대상으로 반복적으로 선택되었는가를 생각해보자. 당대의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선호하는 것들이 로컬리티와 교차할 때, 그것은 향후 소급적으로 ‘대표성’을 띨 가능성이 있다. 제주를 그런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가령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국제도시이자 상업도시로서의 기획에 발맞춰 기업들의 잇따른 사옥 이전이 이루어졌다. 항공관광이 보편화되면서 뛰어난 접근성과 물리적 거리감을 동시에 가지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푸른곰팡이 사단을 중심으로 한 뮤지션들을 비롯하여, 일군의 ‘힙스터’들이 형성해온 거주문화가 제주생활에 대한 로망을 형성했다. 이는 <효리네 민박> 같은 컨텐츠가 작동하는 배경이자 성공 요인이 되기도 했다. 더불어 얼마 전 제주에서 퀴어퍼레이드가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 제주도는 이제 책방과 카페가 많고, 문화 트렌드가 무람없이 정착할 수 있는 땅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의 문화산업은 최근 새로운 컨텐츠 개발에 애를 먹고 있다. 때문에 과거의 것들을 불러오거나 재조립하는 것이 돌파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이런 경향은 영화·드라마와 같은 영상 컨텐츠 산업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처럼 오래된 컨텐츠를 다시 만드는 외연적인 방법이 있는가 하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나간 시절을 추억하는 내연적인 방법이다. 최근에 본 <우리의 20세기>나, <굿 걸즈 리볼트>와 같은 컨텐츠는 모두 일정 정도 레트로(retro)한 색채를 띤 작품들이었다(물론 미국의 영상 컨텐츠 산업은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며, 편향된 모집단으로 일반적 결론을 내리려는 서툰 시도는 아니다. 복고에 대한 향수는 한국에서도 강하게 엿보인다). 아마도 현 정권 하에서 이 경향은 더욱 강해질 소지가 있다. 희망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를 상상하는 데에서 찾아지곤 했으나, 20세기적인 관점이 종언을 고한 이후 지금에 이르지 못했던 과거에 다른 지점을 마련하거나, 과거를 다르게 반복하는 데에서 찾아지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와 로컬리티의 문제가 <우리의 20세기>와 같은 특정한 컨텐츠에서 결합할 경우, 제주에서의 삶들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2010년대적인 것을 회고하면서, (어디까지나 지금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미래의 시간에, 지금을 회고하면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컨텐츠가 만들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라고 전적으로 ‘지금’에 귀속된 예측을 해볼 수도 있는 일이다.


  최근에 『힐빌리의 노래』를 읽으면서 캘리포니아에 대해 생각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을 배경으로 한 가난한 백인의 성장기인 이 에세이에서 저자가 어렸을 때 놀러갔던 캘리포니아는 자신이 살던 동네와는 아주 다른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그곳이 ‘완전히 딴 세상’이었고, ‘매일매일 새로운 일이 펼쳐졌’고, ‘그날그날이 재밌었다’고 쓴다. 주목할 만한 언술은 이런 것들이다. “동성연애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카스트로에 갔던 날에는 사촌인 레이철 누나의 말마따나 동성연애자들이 내게 치근덕대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143쪽)” 캘리포니아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기존의 이미지들과 이런 언술을 종합하면,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현대사에서 가지는 특질적인 면모들을 엿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서부 특유의 풍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도시는 미래적이고, 실리콘밸리가 기술의 첨단, 기업의 첨단을 선보이며, 인종과 문화가 섞여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도시. 캘리포니아는 디즈니 캐릭터가 탄생한 곳이고, 할리우드에서 매년 수백 편의 영상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며, 아이폰의 도시이기도 하다. 마마스 앤 파파스가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노래한 건, 우연히 아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20세기>의 서사가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를 배경인 캘리포니아라고 생각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는 1970년대의 한복판에서, 언제라도 장밋빛 미래를 꿈꿔볼 수 있는 사업가들의 땅 위에서, 서구를 휩쓸었던 2세대 페미니즘의 조류 속에서, 도로시아는 안정적인 고소득자이고, 셰어하우스를 운영하고, 셰어하우스를 중심으로 모이는 일시적인 공동체 구성원들은 때로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고,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삶의 연속성과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감독은 왜 캘리포니아를 선택했을까, 조지아나 오하이오였다면? <굿 걸즈 리볼트>에서 등장하는 흑표당은 어떤가. 60년대 중반에 만들어져 70년대까지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 운동 중 하나였던 이들은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서 출발했다. 남부지역의 강경한 인종차별을 피해 서쪽으로 이주한 흑인들의 2세대가 인종차별과 경제적인 계급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흑표당은 처음부터 강경한 무력투쟁을 표방했고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남부와 서부의 정치적 시차를 생각했을 때 이런 투쟁이 60년대 말부터 가능했다는 사실은 유의미한 지점이다.


  제주 퀴어퍼레이드에 참석했던 지인의 기록을 살펴보면, ‘서울이라서 가능한’ 자유분방함에 대해 새삼스레 복기하는 부분이 있다. 전통적으로 지역성이 강한 제주는 2010년 2분기 이전까지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구보다 나가는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고, ‘미풍양속’, ‘도민정서’와 같은 이유들이 퀴어퍼레이드와 충돌하는 지역이다(「“퀴어옵서예”, 내가 굳이 제주도까지 간 이유」, 『오마이뉴스』, 2017.11.03. 물론 여전히 서울에서도 퀴어퍼레이드는 저러한 가치관과 충돌한다). 그러나 행사는 큰 무리 없이 치러졌다. 제주에서도 이제는 퀴어퍼레이드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최근 논란의 「강식당」을 제주에서 촬영한 것을 보면서, ‘외국에선 발리고 국내에선 제주야?’라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삼십 년 정도 이후에, 2010년대를 재현하며 누군가 과거를 이해하고 그들의 현재를 긍정하기 위한 컨텐츠를 제작한다면, 배경이 제주가 아니겠느냐고.

작가의 이전글 무엇을 동일시할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