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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독다독 Nov 15. 2017

무엇을 동일시할 것인가?

『나를 보내지마』가 생각하게 하는 것

  학부 시절, 소설 창작 수업을 수강할 때 택배를 배달하는 로봇이 주인공인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10대 초중반에 아무렇게나 노트에 썼던 것 외에는 ‘이야기’를 상상해서 적는다는 것 자체가 생경한 경험이었다. 워낙에 서툴렀던 나머지 뭘 어떻게 쓴 건지, 지금 떠올려보면 모를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창작에 관해서라면 아는 게 전무하다. 그런 와중에도 당시에 나는 그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지점이 하나 있었는데, 로봇의 1인칭 시점이라면 문체에서 로봇의 느낌이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상상한 택배 로봇은 고도화된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었고 인간과 대화가 가능했지만,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움직여야 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정합적으로 사고해야 했다. 때문에 로봇이 사고를 전개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서술들은 여러 변수들 중에 적절한 것을 선택하거나, 또는 알고리즘을 거치듯 순차적이거나 하는 등의 특징을 보여야 한다. 이게 내 생각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에 대해 작가주의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의 다른 작품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보내지 마』의 스타일이 그의 여느 작품들과 다르지 않다면 내가『나를 보내지 마』에서 받은 느낌들 중 일부는 그의 스타일에 종속될 테니 말이다(물론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에서 그의 스타일이 특정한 소재, 플롯과 결합해 있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고, 작품의 느낌과 작가의 느낌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테다). 『나를 보내지 마』의 스타일을 철저하게 작품 내적인 것으로 한정하고 읽었기 때문에, 그것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설정한 복제인간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서사를 끌고 가는 개연성, 특히 감정의 개연성은 그런 정체성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복제인간의 세계인식이다. 어떻게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A4 네 페이지짜리 쪽글이 떠오른 건 그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철저하게 자신이 만든 인물들의 관점에 입각해서 이야기에 접근한 것 같았다.『나를 보내지 마』의 서사와 인물들의 감정에서는 그가 구축한 세계를 살아가는 복제인간의 느낌이 난다. 그러니, 이 소설에 온전히 빠져들기 위해서는 소설 속의 복제인간에 어느 정도 동일시가 가능해야 한다.


  이 말이 우스갯소리처럼 들린다면 인물에 이입하는 것이 소설을 읽을 때 지극히 당연한 명제라는 사실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동일시 없이 대상을 바라보는 일은 조금 과장을 보태면 불가능하다. 아무개의 이론을 들고 올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정이 간단하지 않은 것은, 장르문학뿐만이 아니라 순문학에서도 이제는 해묵은 소설의 소재 앞에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것에 동일시가 가능한가?”라는. 이 질문은 앞선 질문 하나를 감추고 있다. 우리는 인간에게 완전한 동일시가 가능한가? 가슴에 손을 얹을 시간이다. 정말 그런가? 이 경우 역시, 아무개의 이론을 들고 올 필요 없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개 알고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인간에 대한 동일시는 필연적이다. 그러나 완전한 동일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것에는 동일시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가능한가?


  마담은 상징적인 인물이다. 마리끌로드라는 이름이 극 후반에 밝혀지기 전까지 그는 철저하게 ‘마담’이라는 호칭으로 존재한다. 헤일셤에서 복제인간들과 직접 관계 맺는 선생들과 달리 그는 외부에서 개입하는 주요 인사이기 때문에, 인물들에 대한 마담의 반응은 그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대변(represent)한다. 따라서 작품 초반에 그려지는 한 사건-마담이 운전사나 정원사, 기타 외부인(이들은 소설에서 유의한 비중을 획득하지 않는다)과 달리 학생들과 말을 섞지 않고 거리를 두는 이유는 그들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는 루스의 가설을 학생들이 검증해보는 사건(53-59쪽)은 아직 어린 인물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된다. ‘마담은 헤일셤의 학생들을 무서워한다.’ 이 명제는 이후 독자들의 정보량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이렇게 변한다. 인간들은 복제인간들을 무서워한다(“그녀가 너희를 두려워한다고? 우리 ‘모두’가 너희를 두려워한단다.”, 368쪽).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의 간극은 이렇듯 공포로 메워져, 심원하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소설이 미스터리와 같은 긴장감을 놓지 않고 명확한 설명을 계속해서 우회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시점까지는 중심인물들이 복제인간이며, 자신의 모상에게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혹은 짐작만 한 채), 안개 낀 정경 같은 그들의 성장기를 초조하게 지켜본다. 헤일셤의 학생들과 선생들, 마담 모두를 ‘인간’으로 인식하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세계에 각인되어 있는 저 심원한 거리를 인지했을 때 경험하는 난감함은 우리가 복제인간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와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막연하게 추측하고 있던 조각들이 맞춰지고 날 때쯤 우리는 중심인물들 사이의 갈등에 신경 쓰느라 여념이 없게 되지만, 작품 후반에 뒤늦게 이루어지는 마담과의 재회는 갑작스레 ‘인간’의 입장과 나의 입장을 동일시해보도록 요구한다. 이때 인간의 입장과 나의 입장 간의 거리가 심원하게 느껴질 거라는 건, 여러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가령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처음부터 중심인물들이 복제인간이며 복제의 목적은 장기기증이라고 선언되었다면 그들에 동일시가 가능했을까? 적어도 이만큼에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일시는 구별짓기의 심화 혹은 퇴화를 통해 강해진다. 전자는 숭배의 대상이 될 정도로 완전하게 주체와 구별된 존재에 대해서, 후자는 주체와 다방면으로 유사한 존재에 대해서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후자의 방법을 선택한 덕에 우리는 무리 없이 중심인물들에 이입할 수 있다.


  그러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목적은 단순히 독자가 복제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인간과 거리를 둠으로 인간됨의 조건에 대해 반성적으로 고민해보는 것만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복제인간에 대한 동일시 역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나를 보내지 마』의 스타일을 한 단어로 말하면 이질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영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 성별에 따른 감수성 차이 등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다.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감정적 반응, 사고방식 같은 것들, 그러니까 그냥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인 채로 의문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하는 모종의 애티튜드가 인물들의 삶에 깔려 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간 후에, 인물들은 이삼십 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식수술 중 사망하는 삶이 예정되어 있으며,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운명을 명확히 알고 자라는 것과 모르고 자라는 것 중 무엇이 더 올바른 일인지 인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는 것, 우리가 경험했거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화와는 처음부터 다른 틀이 이들의 삶을 주조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되새기고 나서야 어떻게 형성되는지 이해하게 되는 애티튜드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다른 삶, 다른 사회화, 다른 사고방식, 비슷한 외형.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유적 존재인가? 결국 마담에게도, 캐시, 토미, 루스에게도 깊이 이입하지 못한 채 마무리를 맞이하며, 우리는 캐시의 마지막 말처럼 소설 밖으로 돌아온다.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나는 흐느끼지도, 자제력을 잃지도 않았다. 다만 잠시 그렇게 서 있다가 차로 돌아가 가야 할 곳을 향해 출발했을 뿐이다.”(393쪽)


  『나를 보내지 마』는 슬픈 이야기지만, 우리를 쉽사리 비통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아니다. 심원한 거리는 여기에도 자리한다. 나의 슬픔과 이야기의 슬픔 사이의 간극. 이 거리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동일시의 조건에 대해 묻는다. 이제 와서 캐시, 토미, 루스가 인간이냐 아니냐를 갈라보려는 시도야말로 해묵은 일이다. ‘무엇이 인간인지’ 묻는 그들의 삶을 앞에 두고 우리와 그들을 동일시하게 되지만, 마리끌로드가 “가엾은 것들.”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와 우리를 동일시하게 되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경계를 따져 묻는 일이 아니라, ‘동일시’라는 인식 자체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복제인간은 이 점을 돌출시키기 위한 최적의 소재다. 그러나 복제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다뤘다고 해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났겠는가? 즉, 나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다가갈 때 그것이 어떤 세계이든 우리가 최소한의 동일시조차도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동일시 없이 대상을 바라보는 일은 조금 과장을 보태면 불가능하다. 아무개의 이론을 들고 올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나의 세계에 들일지 허용하는 나의 선택적 동일시를 반성하는 것은, 처음부터 허점을 노출하는 태도다. 우리는 다만 인정해야 할 뿐이다. 우리는 늘 어떤 것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다. 우리는 동일시를 조정하는 게 아니라, 나와 대상과의 차이를 조정하여 거리감을 조절하고 관계의 형식을 설정한다. 차이의 즉자성을 자각하거나 차이를 지우는 커다란 감정을 통해 우리가 대상을 환대할 수 있는 것은, 그 바탕에 동일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 것에 동일시가 가능한가?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얼마나 가능한가? 우리가 하려는 만큼 가능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은 불가능을 향하는 노력과 방향을 끌어안은 환대의 윤리를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기작을 해명하는 말이다.『나를 보내지 마』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그 세계 속 복제인간의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복제인간이라면? 나의 삶은 학교를 다니고, 나이가 차면 기증을 시작하고, 평균적으로 두세 차례 기증을 하고 나면 죽게 되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면? 나의 모상이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면? 그런 와중에 내가 누군가와 사랑하게 된다면? 어차피 완전할 수 없는 질문들이 진지할수록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복제인간의 삶에 대해 예의를 갖추게 된다. (비)인간이라는 자격은 그리 유의미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자격을 획득한 타자조차 환대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도 없다. 이 소설은 인간이 좀처럼 상실해본 적 없는 환대의 메커니즘을 호명한다. 그 점이 해묵은 소재를 해묵은 서사에 가두지 않는 작품의 윤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일시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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