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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꽐라리 Feb 11. 2022

이것은 나를 위한 맥주 일기장

사실 꽤나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우리가 사는 곳의 맥주 이야기를 기록할 마땅한 방법을 고민해왔다. 그래서 처음 생각했던 것이 유튜브였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내가 즐겨보던 슈카나 빠니보틀같은 분들의 영상을 떠올려보면, 과연 내게 그만한 영상을 만들 정성이나 열정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의문만 들어서는 아무것도 되질 않으니 글쓰기라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벌써 눈치챘겠지만 나는 맥주를 즐겨 마신다. 그리고 내가 시작하려는 것은 나를 위한 맥주 일기장이다. 사실 맥주 일기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앱에 사진과 점수를 올리는 정도만으로는 나중에 기억해낼 자신이 없어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기록을 좀 더 남기는 것이 좋겠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정도로 술을 지속적으로 마신다면 나중에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맥주의 맛과 그 병을 따던 (혹은 탭에서 받아오던) 날의 기억이 날 남아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재능이라면 재능이겠다.


거창한 맥주에 얽힌 지난 역사나 맥주의 종류니 기원이니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사람이 취하다 보면 말이 많아지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게 마련이니, 사족 정도는 남겨보려 한다. 나보다 더 훌륭하신 지난 성현들이 이미 맥주 이야기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신 지 오래이니, 내가 그리하지 않아도 이 글을 혹시라도 찾아온 독자들은 그분들의 귀한 기록을 이미 접하신 적 있으리라. (나도 그중의 하나였으니.)


하지만 꼭 해야겠는 말은 이것이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려고 한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내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리고 내가 사는 곳의 사람들이 맥주를 즐기는 양식이다. 내가 바라본 내가 사는 곳의 맥주는 그 자체로서 즐기기 좋은 무언가 이다. 그것도 취하고 싶어서가 아닌, 같이 나오는 안주와 어울려서도 아닌, 맥주 그 자체가 좋아서 좋은 무언가 이다 (물론 마시면 취한다는 부작용은 꽤나 매력적인 장점이긴 하다). 하나,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22년까지도 한국에서 맥주의 위상은 마시면 배부른 술, 소주를 타기 좋은 술 정도인 듯하다. 내 이 보잘것없는 일기장이 무슨 힘이 있어 그런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나는 내가 맥주를 즐기는 모습을 남김으로써 조금이나마 바꿔보려고 한다. 관계자 분들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한국 맥주가 그 자체로 더 맛있어지고 더 다양해지는 게 선결조건이겠지만 말이다. 맛에 예민하고 맛집을 사랑하는 한국 사람들은 분명 더 맛있는 맥주를 그 자체로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 첫 일기를 시작한다.


Reiver Red

Steel Bonnet Brewing Company

17년 3월 4일에 처음, 20년 12월 30일에 한 번 더


추억 보정이라는 말이 있다. 기억은 일어났던 일을 실제보다 부풀려져 머릿속에 남아 있기 마련이다. 거기에 찾는 대상의 희소성이 얹어지면 애타는 마음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맥주는 사실 입가심으로 마시자며 와인을 마시고 돌아오던 어느 산 중턱의 동네 사람만 찾아올 것 같은 맥주집에서 처음 발견한 것이다. 사실 이건 뒤에 기술할 이 맥주에서 느낀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다소 맥 빠지는, 진부한 표현이고, 실제로 나는 이 맥주집을 한 번 가보고 싶었더랬다. 예전에 이 산 아래의 바닷가 마을에 있는 맥주집을 한 번 다 훑었던 적이 있는데 이 집만큼은 산 중턱이라 취하기도 했고 가지 못했었다. 그래서 와인을 마시고 돌아오던 차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나는 여기를 들러야겠다고 일행에게 주장했었다.


맥주집 이름은 Steel Bonnet Brewing Company인데 탱크가 대여섯 개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맥주집이다. 커피로 치면 동네 커피샾인 셈이다. 당연하게도 음식 같은 건 팔지 않고, 그래도 혹시나 출출한 사람들을 위해 이런 맥주집 앞에는 돌아가며 푸드트럭이 선다. 기억으로 처음 방문했던 날에는 아무 트럭도 없었는데 아마도 식사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17년에는 드물게도 영국식 맥주를 만들어 팔고 있었는데, 다시 방문했던 2020년에는 죄다 다소 진부한 맥주들로 레퍼토리가 바뀌어 있었다. 어찌 보면 동네 맥주집만의 장점일 텐데, 갈 때마다 대표 메뉴가 바뀌는 맛집 레스토랑 같달까.


레드 에일인데 드물게도 훈제를 한 몰트로 만든 훈제 맥주였다. (사실 드문 수준이 아니라 내가 2017년 기준으로도 적지 않은 종류의 맥주를 마셔 보았음에도 두 번째 보는 훈제 맥주였다.) 맥주에 훈제라니 사실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앞서 맛보았던 훈제 맥주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며 들이켰었다. 물론 이건 기우였는데, 이내 코에 감도는 진한 훈연 향에 육성으로 "그래 이거지"하며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마셨던 맥주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계속 이 맥주 생각이 끊이질 않았었다.


훈제 맥주같이 특이한 맥주는 자주 주조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왜냐하면 더 보편적인 맥주(예를 들면 IPA)에 비해 인기가 덜하기에 탱크가 대여섯 개인 업장 입장에서 이에 할애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맥주가 신선 식품에 준한다는 사실에도 기인하는데, 내가 알기로 에일류는 고작해야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 정도밖에는 품질 유지가 안된다. 그러니 미리 왕창 만들어놓고 저장해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특별한 종류의 맥주는 연중 만들지 않고 주로 연말, 연휴 기간에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 말인즉 2017년 이후로는 내가 이 맥주를 구경하기가 힘들었다는 말이다. 그때도 왜 내가 그 맥주를 그라울러에 담아오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를 했는데, 그 후 1년인가 2년 후 한 차례 더 방문했을 때에는 그 맥주를 그해에는 만들지 않았다는 소식까지 들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럼에도 이 맥주의 첫 기억이 도저히 떨쳐지지 않았기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2020년, 우연히 산을 넘어갔다 오는 길에 다시 들렀던 맥주집에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원래는 그냥 한 잔 정도 걸치고 돌아가야겠다 하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싶어 주인장에게 물어 들은 소식이었다. 그 해에는 훈제 맥주를 만들었고 꽤나 잘 돼었으며 곧 탭에 올라오니 다음 주에 다시 와달란다. 그간 적지 않은 수의 인상적인 만남을 맥주와 가져왔던 나였음에도 기쁨을 감추기 어려웠다. 마치 왕래가 뜸하던 옛 친한 친구가 내일 내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느낌 정도랄까. (맥주는 나에게 친구만큼이나 가까워져 있다.) 두근거리며 그다음 주에 결국 재 방문, 한 크라울러 가득 담아왔다. (주: 요즘 이곳 맥주집들에서는 크라울러라고 하는 32온스짜리 즉석 캔에 맥주를 담아서 준다. 아무래도 캔이 그간 사용하던 그라울러에 비해 밀봉이 잘 되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왼쪽 사진의 캔이 바로 그것이다.) 두 캔 이상 사 오지 않았던 것은 첫째로, 다른 맥주들도 한 크라울러씩 해서 몇 캔을 사 왔고, 둘째로는, 맥주도 만들 때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어떤 맥주들은 빈티지도 따진다) 내가 기억하던 그 맛이 아닐까 염려가 돼서였다. 맛이 괜찮으면 또 가서 사 오면 될 것 아닌가.


2020년에 다시 마셨던 훈제 맥주는 내 기억 속의 그 맥주와는 거리가 있었다. 물론 꽤나 괜찮은 맥주였고 아내와 내가 즐겁게 술잔을 기울였었지만, 안타깝게도 2017년 그 흥분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첫 기억이 추억 보정이 되어서 만은 아닐 것인데, 듣기로 맥주장이 그간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2017년에 비해 2020년의 나는 맥주 애호가로서 조금 더 성장해서 (혹은  열정이 조금은 사그라들어서) 일 수도 있다.


당연하게도 2020년의 나는 그 산을 다시 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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