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C의 기억
연합사단에 지원할 때 토익 성적은 있었으나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토익이라는 이름이 들어가 익숙한 토익스피킹 준비를 했었다. EBS교재로 Gwen Lee선생님 강의를 4만 원 정도에 구입해서 들었었던 것 같다. 함께 연합사단에 지원했던 선배와 함께 공부했으나 시험 결과는 좋지 않았다. 버벅댔고, 한여름이어서 너무 더웠고, 옆에서 시험 보는 사람이 너무 큰 소리로 떠들어서 무척 방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 떠드는 사람은 자신 있어 보였고, 결과적으로는 나는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연합사단은 합격했고, 토익스피킹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연합사단에 3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영어 성적을 신경 쓰지 못해서 코로나 사태 발발 전 토익 시험도 갱신했고 2월 말에 오픽도 보려고 "오픽노잼" 유튜브 방송도 출퇴근할 때 열심히 들었다.
https://youtu.be/KmwkLWUsJrg?si=SIjObs5drI_m833_
오픽노잼 선생님은 한국사람과 결혼한 쾌활한 장모님을 둔 아주 밝은 한국계 교포로 알고 있다. 한번 들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오픽시험을 염두에 (안 둘 수는 없고) 두지 않고 방송에만 집중이 되었다. 그 방송에서는 아주 다양한 레벨의 실제 응시자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내가 미군부대 생활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여 (카투사교육대 교관 시절에 역시 함께 있었던 교관과 함께 한 통역준위 첫 회 때도 고배를 마셨지만) 프리토킹에는 나름의 나 스스로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오픽노잼을 들으며 나 혼자 웅얼웅얼 대면서 증말로 그것은 자만 중에 자만이라고 느껴졌으며, 나는 미군의 정서와 문화를 잘 알고 이해할 뿐, 모르는 이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에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이 점점 들며, 마치 토익스피킹 시험 응시 때 자존감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계속 오픽노잼을 (듣기는) 들었다. 그러다가 코로나 사태 발생으로 모든 시험이 취소되고, 나의 오픽에 대한 부담감도 취소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3개월 이상이 지나고 벌써 5월, 6월 말이면 교육파견을 떠나야 하는 상황. 그 이후에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반드시 교육 전 오픽 점수를 기변(기록변경의 약자. 군에서 '개인자력표'라고 하는 경력사항에 스펙이나 여러 인사정보를 수정하는 일)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어느 날 아침 상쾌하게 모닝 런을 뛰고 준비되지 않은 채 우발적으로 헉헉 흘린 땀을 식히며 오픽시험에 접수해 버렸다.
그게 오늘 영통(수원) OPIc 센터에서의 첫 시험이다. 희한하게 오픽노잼 강의에서 한 가지 기억에 남았던 것은 “스크립트(대본)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세요!”였다. 오픽학원을 다니며 스크립트를 외워서 시험을 보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렇게 하면 grader(평가자)들이 모두 알아챈다고. 그래서 오늘 아침까지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사람은 원래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듣기 마련이니까.
다만 시험이 다가오자 소심한 나는 어제 이번에 새로 연합사단에 전입온 후배지만 내가 존경하는 서상사를 만나서 어떤 유형으로, 어떤 방식으로 시험에 임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물어보았다. 안 만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서상사는 군단장실에서 근무했던 인원답게 너무나 나긋나긋하고 조리 있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오픽에 대해 맞춤식으로 눈높이를 맞추어 내게 설명을 잘해주었다. 이번 기회를 빌어 서상사에게 specially thanks를.(밥도 사주는 걸로) (이게 벌써 몇 년 전인가? 사줬나.. 나의 브런치 열혈 구독자가 되리라 확신하는 서 OO 상사, 이서 이 글을 읽고 댓글 달아줘)
어젯밤 적어도 내 소개글이라도 좀 써 보고 survey(오픽 시험 전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뭘 선택해야 하는지만이라도 생각해 보고 자려고 했으나 일주일간 피곤했는지 목욕을 마친 아이들과 함께 그대로 잠이 들어서, 오늘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 그때부터 오픽노잼 강의를 오랜만에 한 두 개 들었다. 역시 들어오는 이야기는 survey에서 거짓말로 아무 직업도 아니고 아무 취미도 없고 아무 운동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적지 마라! “Honest is best policy.”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 말만 들어왔다. 서상사 이야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나는 군인임을 자랑스러워하기에 당당히 내 직업, 군인, 나는 두 아이와 아내와 산다. 취미는 그림 그리기이다. 주짓수를 배우기에 주짓수를 취미로 하려 했으나 그런 것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고, 주짓수를 잘 배우기 위해 (유연성이 떨어져서) 2주 다닌 요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운전을 해서 40분간 수원으로 가는 동안 나는 혼자 내 소개글을 생각해 보며 마구 떠들어 보았다. 즐겁게 친구와 대화하듯 하고 오라고 한 서상사와 내 친구의 조언을 듣고 주눅 들지 않고 토익스피킹 때의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흥분되고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려 애썼다.
'즐겁다! 비가 많이 오지만 즐겁다! 나는 EVA랑 친해질 거다!'
도착해서 EVA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말을 마구 걸었다. 날씨가 어떠냐고 하는데 마침 비가 많이 와서 Monsoon(장마) 시즌이 시작된 거 아니냐고 떠들어댔다. 처음이라 몰랐지만, 시험 주제가 아주 다양하지는 않았다. 한 문제에서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 다음 문제를 들었는데 내가 앞에서 이미 한 이야기를 또 할 수밖에 없어서 겹치기도 했다. 한데 뭐 이미 recording(녹화)되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뭐라도 말을 해야지.
처음~세 번째까지의 질문은 recycling(재활용)에 대한 나의 기억과 누가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엄청 자세하게도 물어봤다. 착한 EVA가..^^
어렸을 때 재활용을 어떻게 했었는지도. 그 대답은 우리나라가 재활용을 해야 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놓은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사실 30년 이상 되었을 수도 있다). 나 어렸을 때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지금처럼 재활용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고 내 멋대로 -흥분을 잃지 않고- 대답했고, 아이 둘을 키우니 과자 및 용품이 엄청나게 매일매일 발생을 하니 정해놓고 리싸이클링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되는대로 한다고 했다.
상점에서 옷을 몇 벌 구매하는 상황을 주며 어떤 부분을 직원에게 요구할 것인지 3가지 이상 나열하고 그 옷이 잘못(not correct)되었을 때 어떻게 컴플레인할 것이며 어떻게 조치할 것인지 말하란다. 마침 내가 나이키 운동복을 샀을 때 한번 세탁했는데 로고가 떨어져 나가서 전화해서 조치받은 경험을 말했고, 사실은 아니지만 롤플레잉을 해야 하기에 이야기를 좀 만들어낸 부분은 로고가 떨어진 티셔츠를 배송을 해주지 않는다고 하여 그러면 내가 픽업하러 갈 테니 양말을 무료로 제공하라고 협상했다고 했다. 상대방이 없는데 혼자 롤플레잉을 하는 방법은 오픽노잼에 자세히 나온다. 미친놈처럼
"Oh man oh my gosh. You want me to go there to pick my shirts for you? That dosen’t make any sense at all.(오 세상에! 너를 위해 내가 네가 있는 곳으로 셔츠를 픽업하러 가라고? 그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잖아!) 떠들었다. 옆과 뒤에 앉은 사람이 싫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배려할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아주 방해가 될 정도로 말하지는 않았을 거라 내 멋대로 믿고 있다.)
나는 주짓수나 달리기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데, 친절한 EVA는 겨우 2주 다닌 요가에 대해 질문을 3가지나 쏟아 냈다.
1. 너 요가 배웠다고 들었는데 요가할 때 무슨 옷을 입는지 최대한 자세히 묘사해 주세요(?)
2. 너 요가 배웠다고 들었는데, 요가 강사 등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을 말해보세요.
3. 왜 요가를 배우기 시작했고 누구와 요가를 했는지 말해 보세요.
요가할 때 나의 sensitive(민감)한 곳을 가리기 위해 레깅스 위에 반바지를 입고 한다는 게 첫 번째 답의 골자였고, 요가 강사님은 용인대학교 체육대학을 나오셔서 용인대는 우리나라 탑 클래스이고 부드러운 음악과 아로마테라피와 같은 그런 부드러운 부분은 나와는 맞지 않는데 내가 배운 요가 강사님은 멋지고 체력적으로 아주 힘들게 해 주셔서 너무 좋아한다고 했고, 주짓수를 배우는데 유연성이 필요해서 주짓수 사범님이 요가를 배우는 게 좋겠다고 했고 이미 다니고 있었던 아내가 추천해 주었다고 했다. 말하다 보니 다행히 몇 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그림 그리기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나는 따라 그리는 정도이고 첫째가 내 그림을 좋아하는 걸로 아주 만족하고 전에 부대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찾아낸 방법이 그림 그리기여서 그 정도로 생각했는데, 유명한 그림작가를 두 명 거론하고 그 두 명의 예술적 측면에서의 차이점을 설명하라는 둥, 요새 예술업계에서 핫이슈를 말해보고 그것에 대한 너의 의견을 말하라고 하는데,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어서 EVA한테 따졌다.
“Hey, EVA, you know what? I just draw for myself and my kids. My kids are happy to see my picture and that is all I want. My drawing tools are just crayons and sketch books.
I don’t know jack shit about artists and the issues. OK? So don’t ask me about those... please."
(헤이, 이바, 너 그거 알아? 난 그냥 나 자신과 나의 아이를 위해 그릴뿐. 내 아이는 내 그림을 보는 걸 좋아하고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내 그림 도구는 단지 크레용과 스케치북이라구. 화가와 그런 미술 이슈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른다고! 알았어? 그러니까 그런 거 묻지 마..)
오픽노잼에서 진짜 많이 강조했던 건데, 시험 볼 때 화내도 된다고 했고 똥 이야기를 해도 된다고 했고 본인은 욕도 자주 한다고 했다. 뭐 나는 욕은 안 했으니까. 좀 화가 나서 약간 격앙되었을 뿐. 중요한 건 내가 주눅 들지 않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했다.
자꾸 더웠다. 실내가. 팔을 걷었고, 마스크를 벗으면 퇴실이었기 때문에 얼굴이 화끈화끈해지는 데도 40분 거의다를 떠들었다. 힘이 빠졌다.
“너, 가족과 함께 집에 산다고 했는데, 너네 집에서 네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고 그 이유는 뭐니?”라는 질문에는
"EVA 너도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으면 알꺼야, 부모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지만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나는 부엌에 식탁 뒤에 아이들이 안 보이게 숨어. 거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야."라고 할 때는 한껏 흥분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가 수그러들며 맥이 풀리기도 했다. 마치 토익시험 볼 때 남은 시간이 30분인데 독해 문제가 너무 많이 남은 것을 발견했을 때처럼.
생각나는 문제는 이 정도였던 것 같다. 마지막에는 EVA에게 내가 너무 뭐라고 한 것 같아(사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EVA, 오늘 만나서 반가웠고 너 모습 참 아름답다. 오늘 함께 해 줘서 좋고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만나. 하고 잘 작별해 줬다.
성향이 다른 아내와의 경험담을 토대로 연재합니다. 핑크빛 러브스토리보다는 인간 본연을 탐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distop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