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 12_흑백으로 꾸는 꿈

어쩌면 나는 빨간약을 먹었는지도 모르지

by 달을읊다

꿈을 꿨다. 간만에 흑백으로 꾼 꿈이었다. 아침 잠의 끝에 비몽사몽 하면서도 이 꿈 기억해야지 싶었다. 그럼에도 꿈은 어째서 그렇게 금방 기억에서 흩어지는 걸까.


누군가어딘가에 있었다. 누군가는 꿈속에서 안다고 설정되어 있는, 사실은 생판 모르는 꿈속 주민이다. 같은 회사 동료라고 하는데 머리가 긴 여자분이었다. 둘이서 어딘가에 갔다. 무슨 행사 같은 걸 하는 것 같았다. 학교 교실이라던가, 오래된 회의실 같은 느낌이었다. 연필로 그린 사무실 풍경화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꿈속에서조차 여긴 왜 이렇게 어둡지, 싶을 만큼 어두웠다.


그 교실인지 회의실에는 다른 누군가가 몇 명 더 있었다. 거래처 사람들인 듯, 적당히 알고 지내는 건너 부서의 사람들인 듯, 다소 경직된 투로 친절했다. 그들과 뭔가 담소를 나누고 뭔가 먹기도 했다. 나의 회사 동료라는 머리 긴 여자가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간다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자 문 밖에서 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잠깐의 일이었다. 그리고 금방 다시 문이 열렸다. 그녀의 표정을 본 기억은 없는데, 겁에 질린 목소리만 들렸다.


"여기, 이상해요. 빨리 나와요."


그녀와 나 사이에는 거리가 꽤 있었는데도, 그녀가 속삭이는 그 목소리는 나에게만 들리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적당히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녀가 좀 더 크게 문을 열어 빛을 방 안으로 비추어 주었다. 그때 이상한 것을 느꼈다. 빛에 닿은 부분이 - 그녀마저도 - 물에 번진 잉크처럼 형체가 없어졌다. 캐비닛이라던가, 방 안의 벽 쪽을 채우고 있던 뭔가의 무늬 같은 것들 마저.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공포영화 같은 그런 두려움은 아니었다. 불현듯 이게 현실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꿈이라는 걸 알았던 건 아니다.


그때 누군가가 오징어 튀김을 가지고 왔다. 분식집에서 나오는 것 같은 토막 난 다리들이 아니라, 반건조 오징어에 튀김옷을 입혀 통째로 튀긴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다리 부분만 가지고 와서 그 열 개의 다리를 하나씩 찢어 모두에게 나눠줬다. 내 손에도 두 개의 오징어 다리 튀김이 쥐어졌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것은 현실이 아닌데 이 튀김은 왜 따뜻한 걸까. 분명 손 안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알람이 울리기 직전까지.


나는 알람 소리를 듣고도 잠시 동안 꿈을 이어보려고 시도했다. 나는 분명 꿈속에서 그게 현실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적어도 꿈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도화지에 4B 연필로 그린 것 같은 그 2D의 세계와 내 손 안의 그 튀김의 온기가 잘 매치되지 않았다. 그때 별로 무섭지는 않았던 그 공간에서 왜 나는 소름이 끼쳤는지 깨달았다. 분명히 현실이 아닌 공간에서, 내 손의 온기는 정말 진짜였기 때문이다. 나의 촉감이나 시각, 후각이 - 심지어 나는 오징어 튀김의 냄새까지 맡았다 - 실제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진짜 행세를 한다.


모든 건 뇌의 장난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촉감이나 시각, 후각도 내 피부와 눈과 코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기관들을 통해서 들어온 자극을 뇌에서 자각하고 해석하는 것뿐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불안한 질문에 맞닥뜨린다. 진짜가 아닌 세계에서 진짜를 자각한다면, 진짜 나라는 건 정말 어디에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