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로 출퇴근을 하지 않게 되면서 지하철을 타는 일이 드물어졌다. 어쩌다 자차로 출근하지 못했거나 서울에 약속이 있어서 나갈 때 - 특히 술 약속 - 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지하철을 탈 일이 생기면 만반의 준비를 한다. 마치 비행기나 기차라도 타는 것처럼 말이다. 지갑이나 이어폰은 기본이고, 날씨에 따라 걸칠 것이나 스카프를 준비할 때도 있다. 그럴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메모를 해야 할 지도 모르니 작은 수첩과 필기구도 하나 챙긴다. 마지막으로는 책장 앞에 서서 한동안 고민에 빠진다. 지하철에서 얼마나 머물러야 하는지, 환승은 몇 번이나 하게 될는지, 중간에 걷거나 버스를 경유하는 시간은 얼마나 길 것인지에 따라 그날 들고 나갈 책을 신중하게 고른다. 그러다 보면 나의 지하철 여정의 동반자로 선택되는 책은 대개 단편 소설집으로 정해진다.
단편 소설집이 다른 책과 비교하여 지하철을 탈 때 가져가기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책 자체의 무게가 대체로 가볍다는 점이다. 이때 경쟁 상대로는 에세이집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에세이집을 들고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이건 아닌데 싶거나 눈물을 좍좍 쏟게 만드는 내용이라면 계속 읽기가 난감하다. 그에 비해 단편소설집은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과감히 넘기고 다른 걸 봐도 된다. 확률적으로 책 속의 작품 모두가 정말 별로인 경우는 드무니까. 다른 장점으로는 이야기 자체가 짧아서 집중하기 쉽고, 각 작품을 읽는 시간이 적게 걸린다는 점이다. 장편소설을 읽다가 정신이 팔려서 타야 할 열차를 타지 못하거나 내려야 할 역을 한참 지나치기도 하고, 환승 시 반대 방향으로 타기도 하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단편소설에 손이 가게 된다.
하지만 단편소설이 물리적으로 가볍고 더 적은 시간을 요구한다고 해서 장편소설보다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차이는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자면 다음과 같다.
한편 좋은 소설에서 인물들은 대개 비슷한 일을 겪는다. 문득 사건이 발생한다, 평범한 사람이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고뇌한다, 마침내 치명적인 진실을 손에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신이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식이다. 이 지점에서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이 갈라진다. 단편은 대개 그 깨달음의 순간에서 멈추지만(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장편에서는 되돌릴 수 없는 진실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실존적 단절이 시도되기도 한다.
- 한겨레21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 그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중에서
같은 글에서 그는 “삶의 진실에 베”이는 순간의 망연한 표정으로 단편소설을 설명한다. 당신과 나, 모두가 지어본 적이 있는 바로 그 표정으로. 앞으로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 작품들은 이 날카로운 설명보다는 좀 더 보드라운 느낌이지만, 삶과 세계의 균열이 -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 생긴 어느 순간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좋은 단편소설에 가깝다고 믿는다.
비록 단편소설에 관한 글을 쓰겠노라며 젠체하고 있지만, 나는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다독가도 아니고, 문학비평에도 소양이 없다. 그럼에도 단편소설을 소개해 보려고 하는 것은 이들이 사람들 눈에 밟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의 단편소설이 단편집에 묶이지 않고 저 혼자만 돌아다니는 경우는 보기 어려운데, 대체로 문학 계간지에 실려 있을 때 정도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런 까닭에 어떤 작가의 단편집을 사지 않는 한 표제작이 아닌 단편은 제목조차 들어 보기 어렵다. 아쉬운 일이다.
어떤 뮤지션의 여러 음악 가운데 대중에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숨은 명곡’이라고 할만한 노래를 ‘딥 컷Deep Cut’이라고 부른다. 물론 딥 컷으로 어떤 노래를 선정할지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의 취향에 달린 것일 테지만, 음악을 좀 더 풍요롭게 접하기 위해서는 이런 노래를 찾아 들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 특정 작가 한 사람만 다루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쓰려는 글은 이처럼 내가 즐겁게 읽었던 단편소설 중 딥 컷을 모아보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나만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드는 기분과 비슷하다. 베스트 앨범이 아닌, 그저 나의 취향 모음집. 그것을 가지고 다시 지하철로 돌아간다.
지하철에는 수많은 사람이 무언가를 골똘히 바라보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휴대폰이고, 자신의 눈 안쪽일 때도 있다. 누군가 드물게 책을 펴들고 있으면 몰래 반갑다. 안보는 척하면서 흘긋흘긋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염탐한다.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물지만 내가 읽은 그 단편 소설집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속으로만 백만 번 물개박수를 친다. 약간 감동마저 느낀다. 그리고 묻고 싶어진다. 그 책에서 어떤 이야기가 가장 재밌느냐고, 어느 인물이 가장 마음에 들고 가장 재수가 없었느냐고. 당신이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만 옆자리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어쩐지 우리는 잘 통할 것만 같다.
한겨레21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 그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이 글은 오키로북스의 <도전! 브런치 작가!> 워크샵에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