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금고털이범이다. 당신은 자신이 직접 개발한 훌륭한 장비로 아주 솜씨 좋게 금고를 털어 왔다. 하지만 어느 소도시에서 은행장의 아름다운 딸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다. 당신은 가명을 쓰고 그곳에 눌러 앉아 착실하게 살기 시작한다. 이내 그녀는 당신의 연인이 되고, 그 지역의 사람들은 당신을 전도유망한 젊은이로 본다. 당신은 결혼을 결심하고 과거를 청산하기로 한다. 애지중지하던 금고털이 도구도 옛 친구에게 넘길 예정이다. 무거운 도구 가방을 가지고 외출한 당신은 약혼녀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언니의 아이들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은행에 들르게 된다. 당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당신의 뒤를 추적해 온 탐정이 당신을 몰래 지켜보고 있다. 약혼녀의 아버지는 당신을 포함한 가족들에게 새로운 금고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 사이 아이들끼리 장난을 치다가 한 아이가 금고에 갇히고 만다. 금고는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고, 금고를 부술 수 있는 기술자는 아주 먼 곳에서 데려 와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대로 두면 아이는 금고 안에서 두려움과 산소 부족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이야기를 쓴 오 헨리는 미국의 작가다. 1862년에 태어나 1910년에 죽었다. 오 헨리의 작품은 대체로 낙관적인 편인데, 어쩌면 그가 1차 세계대전도, 대공황도 겪기 전에 생을 마감한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 자신의 삶은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오 헨리라는 이름은 필명이다. 이는 그가 수감되었던 교도소의 간수였던 ‘오린 헨리’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약국 보조며 기자, 은행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는데, 은행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교도소에 갇혔다. 오 헨리는 범죄를 부인하며 남미까지 도주했었지만, 아내가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돌아와 그녀의 임종을 지키고 수감된 것이다. 그는 교도소에서 3년을 복역하고 모범수로 가석방되었다. 본격적인 작가가 된 것은 출소 이후다. 수백 편의 단편을 쓴 당대 인기 작가였다. 하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소수의 출판계 지인만 참석했고, 그의 재혼한 아내조차 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오 헨리의 작품 속의 인물은 대체로 가난한 소시민이고, 교도소 생활의 영향인지 범죄자도 종종 등장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대체로 유쾌하고 다정하다. 소설 속에서 벌어진 사건은 감동스럽게, 혹은 유머러스하게 흘러간다. 부잣집의 아이를 유괴했던 일당이 아이의 잔학무도한(?) 장난을 버티다 못해, 되려 몸값을 주고 아이를 되돌려 주기도 하고(<붉은 추장의 몸값>), 가난하고 젊은 화가가 병으로 죽어가지만 마지막까지 벽에 남아 있는 담쟁이 잎을 보고 삶의 희망을 되찾기도 한다(<마지막 잎새>). 하지만 오 헨리의 이런 기발하고 한편으로는 감상적인 단편소설들은, 그다지 문학적으로 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다뤄지곤 한다. 마치 인간의 심연을 끄집어내어 햇볕 아래 꺼내 놓은 것만이 문학의 ‘깊이'고 ‘가치’인 것처럼. 하지만 120년도 전에 쓰인 오 헨리의 작품들은 21세기의 내게도 무척이나 재밌게 느껴진다. 나뿐 아니라 그의 작품을 읽으려는 사람이 세계 도처에 있기에, 오 헨리의 단편 상당수가 원문으로 웹 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는 것이리라. 한 세기 후에도 읽히는 소설이라는 것은 그의 작품이 세월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지닌, 가치 있는 문학이라는 반증이 아닐까.
다시 이 글의 맨 처음에 이야기했던 작품으로 돌아가자. 이 작품은 <개심>이나 그 비슷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민음사의 ⌜오 헨리 단편선⌟에서는 <완벽한 개심>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작품집에서는 <개심>으로 실려있다.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 지미 발렌타인은 그가 금고털이범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아이를 살릴 수는 없다. 흉악한 범죄자라는 게 알려지면, 비록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그가 원하던 ‘새로운 삶’을 가지기는 힘들 것이다. 과연 지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아이를 구해낸다. 그것도 자신의 금고털이 역사의 신기록을 경신하며.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은행을 나선다. 그리고 은행 현관에서 그를 쫓던 탐정, 벤 프라이스와 조우한다.
오 헨리의 숱한 단편 중 이 작품을 소개하기로 한 이유가 있다. 바로 지미가 처한 갈등의 순간을 묘사한 부분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 헨리는 지미의 내적 갈등을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그저 지미가 무엇을 하는지 충실하게 보여줄 뿐이다. 지미는 갈등하고 고뇌하는 대신 약혼녀에게 알 수 없는 부탁을 하고(‘당신이 달고 있는 장미를 내게 주겠어요?’), 기묘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순식간에 금고털이범의 자아로 옮겨 간다. 마치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모든 일을 마친 후에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책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지미가 망설임없이 금고를 여는 순간, 그는 ‘완벽한 개심’의 상태에 도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타이밍에 그를 잡으러 온 탐정과 조우하게 되지만 말이다.
잊을 뻔했는데, 오 헨리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반전’이다. 요즘 영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충격적인 반전과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일지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의 몇 문장만 살짝 비틀었는데도 상황이 반전되는 재미가 압권이다. 오 헨리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마지막 잎새>만 떠올려 봐도, ‘마지막 잎새’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은 짧지만 진한 감동이 있지 않은가. 물론 <완벽한 개심>에도 반전이 있다. 그 대목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글을 마친다.
문 앞에서 덩치 큰 남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녕하세요, 벤!” 지미가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끝내 찾아냈군요. 해냈어요. 자, 갑시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그때 벤 프라이스가 조금 이상하게 행동했다.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스펜서 씨.” 그가 말했다. “저는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마차가 스펜서 씨를 기다리고 있네요, 아닌가요?”
그런 다음 벤 프라이스는 돌아서서 유유히 거리를 걸어 내려갔다.
: 민음사 ⌜오 헨리 단편선⌟ <완벽한 개심> 중에서
• 오 헨리 작품 원문을 볼 수 있는 홈페이지
http://www.literaturecollection.com/a/o_henry/
• <완벽한 개심>의 원문
http://www.literaturecollection.com/a/o_henry/106/
• 민음사 ⌜오 헨리 단편선⌟
http://minumsa.minumsa.com/book/11581/
• 이 글은 오키로북스의 <도전! 브런치 작가!> 워크샵에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