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어느 맑은 날,
나의 사적인 하루키

by 달을읊다

2009년 7월이었다. 나와 남자친구는 회기역 플랫폼에 서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더운 하루를 예고하듯, 내 눈에는 모든 것이 조금씩 번져 보였다. 이번 열차도 타지 않으면 정말 지각할지도 모른다. 남자 친구와 꼭 끌어안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열차에 올랐다. 자리는 군데군데 비어 있었지만 앉지 않았다. 대신 문 앞에 서서 차창을 통해 마지막까지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았다. 열차가 출발하고 점차 속도가 빨라졌다. 그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마치 노선도에서 뭔가 결함이라도 발견하려는 사람처럼 하염없이 문 위쪽을 쏘아 보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눈 안에 가득 차 있는 눈물을 달랠 방법이 없었다.


남자친구의 입대날이었다. 그를 훈련소까지 배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날 아침 출근길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것이다. 실제 입소 시간은 점심시간 무렵이어서 입소 직전 통화를 하기로 했다. 회사 동료들에게는 점심에 약속이 있다고 해두었다. 열 두시가 되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떴다.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을 수는 없었다. 화장실도 말고, 어딘가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있길 바랐다. 나는 비상구 계단을 몇 층인가 올랐다가, 또 내려오기도 하면서 적당한 층을 찾았다. 10분 정도 후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긴 통화는 아니었다. 우리는 잘 지내라고도, 건강하라고도 했던 것 같고, 편지 쓰라는 말 따위를 드문드문 나누었다. 그러다 시간이 다 되어 버렸다. 저편에서 전화를 끊지 못하기에 내가 먼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나는 잠시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사무실로 돌아갈 수는 없다. 나는 조금이라도 진정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로 했다. 좀 걸으면 좋았겠지만, 그러다 회사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사회인의 모드로 돌아와야 한다. 그때의 내게는 그럴 기운이 없었다. 식사도 생각이 없었다. 문득 회사 근처에 서점이 하나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동시에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긴 제목의 단편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서점에 갔다. 그때도 하루키는 인기 작가였기 때문에, 그의 책만 모아 놓은 서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단편집을 뒤적여 금세 그 이야기를 찾아냈다. 무척 짧은 소설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4월의 어느 맑은 아침, 소년은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라주쿠의 뒷길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가고, 소녀는 속달용 우표를 사기 위해 같은 길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해 간다.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스쳐 지나간다. 잃어버린 기억의 희미한 빛이 두 사람의 마음을 한순간 비춘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란 말이다.

그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남자아이야.


그러나 그들의 기억의 빛은 너무나도 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 전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말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 그대로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고 만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 문학사상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동명의 소설 중에서




책 위에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나는 서가의 위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기에 책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면, 찾는 책이라도 있는 줄 알았을 테니까. 잠시 그러고 있자니 벌써 사무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책을 계산하고 서점을 나왔다. 어째서 하늘이 이렇게 맑은 걸까, 이상했다. 여름이면 비가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사무실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먼저 화장실에 들러 찬 물로 손을 씻었다. 그렇게 차가워진 두 손으로 목을 감쌌다. 너무 더웠던 사람처럼, 그래서 붉어진 것을 식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 이제 들어가야지. 나는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 옆자리의 동료에게 목례를 하고, 책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일에 집중했다. 시간이 빨리 갈 수 있도록, 정말 빨리 가버릴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이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단편은 내용이 짧다. 액자 소설 구성이지만, 여기서는 액자 '안'쪽의 이야기만 소개하기로 한다. 한 소년과 한 소녀가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다. 그들은 금세 서로가 서로의 100% 남자아이, 여자아이임을 알아본다.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원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한 걸까? 그들은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100%의 연인이라면 분명 헤어져도 어디선가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으며. 하지만 그해 겨울, 두 사람은 인플루엔자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기억을 잃어버린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하라주쿠의 뒷골목에서 우연히 서로를 스치지만, 이번에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만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의 경우 남자친구가 군대에 있는 기간 동안 둘 다 인플루엔자 같은 것에는 걸리지 않았고 - 대신 신종플루의 대유행으로 그는 100일 휴가를 나오지 못했다 - 서로를 잊는 일 없이 재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설처럼 우리가 서로에게 100퍼센트의 여자이거나 100퍼센트의 남자라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시험 삼아 헤어져 보는 그런 일은 할 수 없었다. 헤어짐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 이후 우리는 10여 년간 서로의 곁에서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머물다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대체로 행복하게 지낸다. 그러다 이따금 다투기도 한다. 속상한 마음에 남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면, 차창 너머에서 망연하게 나를 보고 있던 빡빡머리의 20대 소년이 - 소년이라고 부를 나이는 아니지만 - 들여다보인다. 그러면 나는 괜히 마음이 아려 그의 손을 꼭 잡아 보곤 하는 것이다.




• 문학사상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http://www.munsa.co.kr/menu2/menu2_1.html?bmain=view&uid=966


• 이 글은 오키로북스의 <도전! 브런치 작가!> 워크샵에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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