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내 마음의 안티에이징

by 달을읊다

머리 쓸 일은 만들지 않으면서 일어나지 않은 일 걱정만 하고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늙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구글에서 기술 관련 문서를 찾고는 영어 해석을 하기 싫어 페이지 번역을 돌리는 것부터 뭣 때문에 내가 휴대폰 액정을 켰더라 하는 경우까지, 젊은 날의 총기라는 건 너무 삽시간에 무뎌져 간다. 일부러 뇌를 성가시게 만들지 않으면,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좋다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끝도 없이 멍청하게 느껴질 때면 뭔가를 새로 배우거나 해보고 싶어 진다. 때문에 집에는 뜨개질 도구와 인디자인 책과 DIY로 만들다 만 가죽 지갑과 수예 틀이 한데 모여 박스에 담긴 채 수납장 제일 위쪽에 놓여 있다. 그보다는 조금 덜 성가신 것을 - 인터넷만 접속하면 되는 - 찾아본다. 기껏 생각해 낸 게 K-MOOC 였다. 개발도 (하기 싫지만) 해야 할 것 같으니 10년만에 소프트웨어 공학 개론이라도 들어야 하나, 하면서. 하지만 그럴 때는 필요한 것보다는 재밌을 것 같은 걸 하는 게 좋다. 우울할 때 '필요한 일'을 하다 보면 왜 아직도 이걸 모르는 건지 한심하고, 그러다 보니 잘 집중도 이해도 안 되고, 스스로의 멍청함이 새삼 부끄러워지는 사이클만 반복하게 된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왠지 지적 허영심은 채워지는 게 좋다. 그 대상이 이번 경우에는 셰익스피어였다.


2월 어느 날 셰익스피어에 대한 강의가 개강 예정인 것을 보고 관심 강의로 등록해 두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나 5대 희극을 읽어본 적은 있다. 다만 워낙 꼬맹이일 때 읽은 거라 원전하고는 제법 거리가 있을 것이다. 우선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집 근처 도서관에서 셰익스피어를 검색해 보았다. 무지막지한 양의 책이 나왔다. 초등학생을 위한 것부터 4대 비극이 낱권으로 발매된 것까지 너무 선택지가 많아 고민스러웠다. 인터넷의 힘을 빌어 셰익스피어의 좋은 번역본이 어떤 것인지 좀 더 찾아보았다. 몇 명의 역자의 이름이 나오고, 절판이라고도 하고, 도서관 웹 페이지에서는 잘 검색이 안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강의가 시작되고 어라, 하는 사이 2주 차 강의 자료가 등록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첫 번째 다룰 작품은 <햄릿>이었는데, 나는 아직 적당한 책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셰익스피어 강의도 (정신적인) 블랙박스에 담겨 선반 제일 위쪽에서 고이 잠들게 되려나 하는 찰나.


팔로우한 인스타그래머가 우연히 그날 <햄릿>을 보러 간다는 글을 올린 것을 보았다. 댓글로는 다른 누군가가 코엑스에 가셨나 보다고 언급했다. 찾아보니 코엑스의 메가박스에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역을 맡았던 연극 <햄릿>의 촬영본을 상영하고 있었다. NT Live라고 영국에서 좋은 연극 실황을 촬영하여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프로젝트라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무려 본 고장 영국에서 올렸던 것을 자막까지 달아서 볼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3시간이나 하는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예매하고는, 평소보다 1시간 일찍 퇴근해서 삼성역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재미가 있을 거라고는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스토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게다가 연극을 눈 앞에서 직접 보고 있다면 모를까, 3시간이나 하는 '연극 촬영본'이 재미있을 리가 없을 것 같았다. 본 공연 영상에 들어가기 앞서 8분이나 주연 배우 인터뷰 장면이 나오는 점도 김이 빠졌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공연 실황의 생생함은 기대 이상으로 잘 느껴졌다(엄청난 땀을 쏟으며 열연하는 장면이라던가). 카메라 몇 대를 이용해 연극 무대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어, 오히려 연극 무대를 직접 보고 있을 때 보다 시각적으로 지루하지 않았다. BBC 셜록을 보고 팬이 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저 유명한 대사 -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 를 읊는 것을 보는 기쁨도 쏠쏠했다. 고전의 우아함과 현대적 연출의 세련미가 잘 어울렸다. 오래간만에 무척 몰입해서 본 작품이었다.


덕분에 첫 주차 셰익스피어 강의도 신나게 들었다(첫 주 강의는 시대 배경 설명이 반 이상이긴 했지만, 역사 얘기도 좋아하니까 뭐). <NT Live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마찬가지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으로 괴물 역할을 한 버전을 상영하고 있어 지난주에도 영화관에 보러 갔었다. 조만간 도서관에도 가볼 생각이다. 직접 책을 손에 들고 내 마음에 들러붙는 버전의 <햄릿> 번역본을 골라보고 싶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마음이 얼마간 젊어지는 묘약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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