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점심값도 아끼고 식사량을 줄여 보고자 점심에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거창한 것은 아니고 삶은 고구마와 삶은 계란 정도다. 처음 한동안은 혼자 도시락을 먹었다. 마침 외부 프로젝트 중이어서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혼자 도시락을 먹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 종료시점이 되자 고민이 됐다. 이제부터 점심은 혼자 먹는다고 할까? 아니면 그냥 이전처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밖에서 식사를 할까? 가뜩이나 사회성이 부족한 캐릭터인데 밥까지 혼자 먹으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이다. 하지만 점심값이 굳는 것도, 가볍게 점심을 먹는 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다행히 대안이 있었다. 조직 내에 여직원 몇 분이 점심 도시락을 먹는 모임이 있어 나는 거기에 합류하기로 했다. 고맙게도 흔쾌히 받아들여 주어 그 이후 지금까지 그분들과 도시락을 먹고 있다.
그 모임의 특징은 나보다 대여섯 살씩 어린 여직원들만 모여 있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다닌 전 직장에서는 여자 후배라는 존재 자체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너덧명이나 되는 90년대생 여직원 무리에 끼어 있는 게 한동안 낯설었다. 그들도 나이 많은 내가 불편할 법도 한데, 적어도 겉으로 느껴지는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그나마 우리 회사는 직급도 없고 영어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었을까. 밥을 먹으며 나누는 별스럽지도 않은 이야기가 훈훈하고 즐겁다. 맛있는 빵집의 이야기, 요즘 신문에 오르내리는 이야기, 여행 이야기, 전날 저녁에 갔던 식당 이야기 운운. 오늘 점심에는 화기애애하게 복권과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가벼운 도박 경험, 경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만 보면 화기애애할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분위기는 실로 화기애애했다.) 누군가 먹고 있는 김밥에 다른 누군가가 싸온 반찬을 얹어 주는 모습처럼, 자연스럽고 다정한 대화다. 때문에 점심시간이면 흔히 감동해 버리고 만다.
사실 회사 다니면서 친해진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대부분 어이없는 일처리, 이해할 수 없는 회사 시스템, 적은 급여, 지 맘대로 헤쳐먹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다. 분노의 이면에는 내가 언제까지 이 직장 내에서 밀려나지 않고 돈벌이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과, 바뀌지 않을 일상에 대한 체념이 서린다. 서로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위안이 되면서 동시에 고갈된다. 때문에 많은 술이 필요하고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그게 흔한 직장인의 수다였다. 적어도 내가 지난 시간 동안 파묻혀 있던, 내가 그토록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중독된, 그런 수다.
저녁에는 남자 친구와 종종 가는 펍에서 피자와 맥주를 마시고 있노라니 네 명의 직장인이 들어와 구석 자리에 앉았다.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넥타이까지 동여 맨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들이었다. 이제 시끄러워지겠구나, 체념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가 갈 때까지 거짓말처럼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뜻 들리는 주제는 장자연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남자친구와 나는 둘이 같이 옷 가게에 가면 흔히 싸웠다고 오해를 받을 정도로 조용한 편인데, 그 테이블에 비하면 우리가 더 수다스러운 기분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직장인인가.
점심 식사 동료들에게도, 오늘 저녁에 만난 다른 별나라 직장인들에게도 직장 생활의 분노가 피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엄연한 직장인이고, 회사는 모든 직원에게 평등하게 스트레스를 안겨주니까. 그러니 이따금 소주 한 잔과 함께 서로 분노를 터뜨리며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는 것도 좋다. 하지만 우린 어디까지나 직장인이니까, 서로의 선을 지키며 온탕 냉탕을 오갔으면 싶다. 건강에 좋을 정도로만,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이 포근해질 정도로만. 아무래도 요즘의 봄날 오후 피크닉 같은 대화에 익숙해지다 보니 배가 불렀나 보다. 이따금 새벽 2시의 회사 인근 포차가 그리워지기도 하는 걸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