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비 오는 밤의 정취

by 달을읊다

남자 친구네 회사에는 세차 동아리가 있다고 한다. 오늘은 그 동아리의 저녁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세차 동아리 모임날답게 오후가 되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야심 차게 동아리 출범 후 셀프세차장을 빌린 첫 모임날, 겨우내 볼 일 없던 함박눈이 쏟아졌다고 한다. 앞날이 걱정되는 모임이다. 하지만 덕분에 어제 오후부터 밀려들던 미세먼지가 한풀 꺾였다. 고마운 일이다.


세차 동아리 회원들이 세차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을 하고 있고, 어딘가의 누군가는 막걸리에 파전을 곁들이고 있을 무렵 나는 치과 의자에 앉아 있었다. 40분에 걸쳐 이 하나하나를 새로 갈아 끼우는 느낌으로 스케일링을 받았다. 1년 후에나 연락을 준다지만, 3년 교정이 도루묵이 되지 않도록 하루에 10시간 정도는 꼭 유지 장치를 하고 있으라고 한다. 지친 나머지 속으로만 뉘예 뉘예 대답을 하고 빗길을 나섰다.


집은 분당이고 치과는 종로인 탓에 명동 국민은행 앞에서 9401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배차 간격이 짧은 버스이지만 눈 앞에서 두 대가 연달아 지나가 버려 10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오랜만에 네온사인이 번쩍번쩍하는 명동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기묘하게 마음이 들떴다. 대각선에 보이는 롯데 영플라자 벽면에서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가 사람 모양으로 조합되어 둠칫 둠칫 춤췄다. 내가 듣고 있는 노래보다는 조금 템포가 빨랐다. 어떤 노래가 저 춤사위에 어울릴까 고민하는 사이 버스가 도착했다.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는 길 내내 붉고 푸른빛들이 빗물에 번졌다. 갑자기 도트의 크기가 커져서 해상도가 낮아진 느낌이었다. 비 안개가 서리고, 라식 후 아직 야간 빛 번짐이 완전히 낫지 않은 탓에 한층 더 세상이 몽환적으로 보였다. 그야말로 사이버 펑크적인 풍경이다. 그 때문인지 다소 기계적인 사운드의 키보드 소리가 나는 노래들이 귀에 착 감긴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 돌아오는 동안 나 역시 내적으로 둠칫 둠칫 춤춘다.


그러고 보면 비 오는 밤의 화려하고 몽환적인 느낌은 전기가 발명된 이후의 일이겠구나 싶다. 비가 오는 밤이면 달도 별도 없고 계속 불을 켜 두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 세상천지가 컴컴했을 것이다. 안 보이니까 오히려 소리나 냄새, 그리고 몸에 들러붙는 수분의 감각이 벼리어졌을 테고, 조상들은 그 감각으로 비 오는 밤 특유의 정취를 느꼈으리라. 그런 밤에 마시는 술 한 잔은 얼마나 달큼했을까? 입 안에서 붉고 푸른빛이 톡톡 터지는 듯,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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