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7코스 걷기는 때려치고 동백동산으로
어제 저녁 심한 두통 때문에 약을 먹고 일찍 잠들었다. 원래 오늘은 7코스를 역방향으로 걷다가 중간에 제주시로 올라가는 일정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걷지 않기로 마음을 바꿨다. 어제 그렇게 급작스레 몸 상태가 안 좋아지는 것을 경험하니 걷고 나서 골골대며 폐를 끼치는 것보다 쉬엄 쉬엄 다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졌기 때문이다. (조식이 어제보다 30분 늦어 셔틀 시간이 애매해진 것도 원인이다.) 바로 제주시로 가도 상관은 없지만, 어디 한군데 둘러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마침 H가 전부터 제주에서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다고 했다. 동백동산에 있는 습지인데, 대부분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도의 현무함 지질 지대에서 드물게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다길래, 그게 뭔지 물어 봤다. 물새를 비롯한 희귀동식물의 서식지로서 전 세계에서 중요한 습지 몇 군데를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동백동산 습지는 조천읍 쪽에 있어서 제주시에서 멀지도 않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출발 전 숙소 바로 앞 바닷가를 잠시 거닐었다. 올레길 7코스 중간에 있는데, 그 앞에는 호랑이 모양이라는 범섬이 있다. 아무리 봐도 호랑이까지는 모르겠고 거북이 비슷하다. 원래 섬에서도 호랑이가 살아서 여기 원주민들이 붙인 이름인지 나중에 육지 사람들이 붙인 이름인지 쓸데없이 궁금해 지기도 했다. 11월초, 제주 남쪽 바닷가의 바람은 잔잔하고 포근했다. 현무암이 울퉁불퉁하게 뒤덮인 해안은 화산 폭발 직후의 제주의 모습을 상상케 했다. 그 꿈틀대는 거대한 생명력이, 이 평화로운 섬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섬의 나이로 볼때 제주도는 육지에 비해서는 갓난 아기 정도로 어린 섬일테지. 중학교 시절 배운 소소한 지질학 지식이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 사소한 호기심들이 보글 보글 끓어 오르는 게, 이것이 제주가 지닌 신비로움이라고 하는걸까.
잠시의 산책 후 여유롭게 스타벅스 라떼 두 잔을 받아 들고 서귀포를 떠났다. 동백동산까지는 1시간 조금 넘는 길이다. 시내를 벗어나자 이내 2차선의 한갓진 도로로 접어들고, 조금은 민둥해 보이는 한라산의 머리가 보이자 우리 나라같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반 년전 하와이에서 H와 함께 달렸던 그 길이 떠오르기도 했다. 자연히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별 다른 목적도 없이 나누는 잡담 사이로 시간은 빠르게 지났고 금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차장은 한가했고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입장료도 없어 기분좋게 동백동산 숲 안으로 들어섰다.
습지 안내소를 지나면 갑자기 깊은 숲 안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사위가 조금 어둑할 정도로 키 큰 나무들이 빼곡히 둘러섰는데, 바닥에 깔린 주먹 크기의 현무암들 때문에 잘못했다간 발목을 접지를 것 같다. 나무를 휘감고 오르는 덩굴 같은 또 다른 나무들이 동남아를 떠올리게 한다. 제주식으로 말해 곶자왈의 전형이다. 입구에서 얼마 안가 두 갈래 길로 나뉘는데, 어느쪽으로 가도 본래 목적인 습지에 갈수 있다. 습지의 이름은 먼물깍, 딱 들어도 멀리 있는 물이라는 기분이 든다. 먼물깍습지를 끼고 한 바퀴 크게 돌아 오는 길은 대략 4km 정도 되는 모양이다. 실제 습지까지 도착하는데 한 시간, 돌아 오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 걸 보니 우리는 도합 두 시간 정도를 덤불숲(곶자왈)에 안겨 있었다.
숲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저마다 좋아하는 숲의 전형이 있을 것이다. 동백동산 숲길은 꼭 제주 바닷가의 현무암 투성이 해변 같다.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발을 잡아채고, 나무들의 생김이 곧지 않고 대체로 구불구불하다. 사람이 걷는 좁은 길 양 옆으로는 그런 나무들이 자아낸 검은 그림자 때문에 고사리 같은 양치류가 뒤덮여 있다. 오대산 전나무길이 엄숙한 승려같다면 이 곳은 원시의 어머니 같다. 거대하고, 꿈틀대는 강렬한 애정의 힘이 느껴진다. 비슷한 느낌을 비자림에서도 겪었다. 다행히 H와 나는 둘 다 이런 숲에 더 호감을 느낀다. 이끼에 뒤덮인 현무암을 모아 놓은 터가 있었는데, 그 곳에 아스라히 해가 들어, 곧 겨울 왕국에 나오는 트롤로 변신할 것만 같았다. 모든 게 살아 숨쉬고 있고, 덕분에 나도 살 것 같다. 발 밑을 조심하며 걷는 동안 정신이 고양되고, 한편 마음에는 잡 생각이 일지 않아 고요하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걷다 보니 먼물깍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규모는 작다. 대신 먼 옛날 용암이 흐르고 급하게 식은 모양이 그대로 주름져 나타난 검은 바위들이 습지의 틀을 형성하고 있어, 무척 이색적이다. 잠시 그 둘레를 돌아 보고 벤치에 앉았다. 습지 위로까지 펼쳐진 나뭇 가지는 없으니, 햇살이 고스란히 비친다. 바람은 가늘게 불어와 습지 바닥에서부터 자란 키 큰 식물의 목을 간질인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솟아나 숲길 사이로 흘러 제주를 적시고 있다고 해도 믿을 법한, 수 억 년의 기억이 요 작은 습지 위에 고요히 흔들거린다.
습지를 떠나 입구로 돌아오는 나머지 길 대부분은 차가 다닐수 있을 듯 크고 반듯한 길이라 조금 실망했다. 흔한 동네 뒷산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마을이 나타고, 누군가 경영하는 산장같은 것도 보이고, 윤곽만 남긴 채 닫은 듯한 건물들이 궁금증을 자아 내기도 했다. 조금은 나른한 기분으로 버섯 재배지와 돌담 너머의 귤밭을 따라 걷는 동안 다시 길이 숲으로 향했다. 숲에 접어든 후 출구로 나올 때까지는 약 1km 정도 길이였는데, 지난 편한 길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좁고 구불구불하고 돌이 많았다. 평지나 다름없어 그다지 힘이 들지는 않지만 등에 조금 땀이 베는 게 느껴졌다. 길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서는 족제비 비슷한 동물을 보았다. 그 쪽 세계에 대해 아는게 없어서 족제비라고 확신하긴 어렵다. 온 몸의 털이 밝은 갈색이었는데 귀는 작고 꼬리가 약간 풍성하고 길었다. 사이가 먼 까만 눈이 순하게 생겨 무척 귀여웠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고도 사람이 다니는 길 바로 옆 쪽에서 종종거리며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이 어쩐지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게 아마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여기 숲에 깃든 어떤 야생의 신이 우리에게 준 작은 선물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아마 동백동산은 장대하고 위엄있는 숲을 기대하거나 거대 늪지의 경외감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곳일수도 있겠다. 길은 어디선가에서는 반드시 헤맬만큼 표지가 엉성한 구간도 있고, 돌 투성이라 발이 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우리 집 뒷편에 두고 매일 걷고 싶은 숲이다. 한 바퀴 도는데 두 시간이 걸리는 규모가 사실 작다고 할수는 없지만, 어쩐지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다. 무조건적인 다정함, 싱싱함, 꿈, 그런 것들에 푹 파묻혀 있다 온 기분이다. 언젠가 비 잔잔히 내리는 초여름이나 첫눈 맞으며 걷고 싶다. 그런 날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한동안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