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 02_어느 날 갑자기 제주에서

올레걷기 축제 2일차, 6코스 완주를 마치고

by 달을읊다

어제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건너 왔다. 한달 전쯤 예약해 둔 올레길 걷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 11월 1일부터 3일까지 행사가 진행되는데, 나와 H는 오늘과 내일 이틀 일정만 참석하기로 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둘 다 직장인이고, 자리를 비워봐야 계속해서 자잘하고 사소한 문제로 회사의 연락을 받는 업무의 담당자였기에 오래 사무실을 비우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 직장 동료이자 나보다 여섯 살 많은 H가 운전을 하기 때문에 차를 렌트해서 편하게 다니고 있다. 올레길 걷기 축제에 참석한 주제에 무슨 차가 필요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행사에서 걷는 길이 제주도 남쪽에 포진해 있기도 하고 우리의 여정상 차가 있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숙소는 서귀포 인근에 잡았는데, 오늘 아침만 해도 출발지까지 가는 셔틀을 타기 위해 이마트 서귀포점으로 가야 했고, 어제 사전 답사를 통해 이마트에 무료로 차를 주차해 놓을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두어 용이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내일 7코스 중간에서 땡땡이 치고 제주시 쪽의 숙소로 옮길 때도 편하게 갈 수 있으리라.


6코스의 시작은 하효항이다. 도착 후 출발지에서 행사 사은품을 받았다. 2만원의 참가 비용에 비해 상당히 실속있다. 간식과 물병, 휴대용 수저에 심지어 휴대용 샤워 헤드와 선크림까지 있다. 결국 오늘 완주 때까지 간식은 하나도 먹지 않았고 짐 때문에 어깨가 뻐근한 나머지 지금 두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시작부터 마음 풍족한 구성이었다.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참가자가 제법 많았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외국인들도 다수 있었다. 사람들이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기분 좋았다. 날씨는 남쪽 나라에 기대하는 바와 같이 따스했다. 걷다 보니 이내 더워져서, 입고 있던 야상은 벗어 배낭에 접어 넣어야 했다. 그러고도 조금 땀이 날 정도의 기온이었다. 6코스 길은 거의 모든 구간이 바다가 보였고, 오름 하나를 거칠 때 빼고는 오르막 조차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었다. 전체 길이는 약 12km 정도, 셔틀을 타고 하효항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열시 정도부터 서귀포 시내로 들어설 때까지 우리는 거의 쉼 없이 걸었다. 그 때가 대략 오후 한 시였으니 세 시간 동안 대략 10km 를 마냥 걸었던 모양이다.


걷는 동안 이런 저런 잡담은 했어도, 기본적으로는 무념 무상의 상태였다. 저 거대한 물을 잡고 있는 중력의 존재가 신비하고, 집 근처에서는 볼 수 없는 열대 식물들의 철모르는 파릇파릇함이 흐뭇하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식물들의 총체가 뿜어 내는 초록색 향내가 상쾌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서 온 여행이니까 이런 걸 소박한 행복이라고 하면 허세스러운 일이겠지만, 주변 풍경의 소박함이 행복해 보여 나의 행복도 소소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제주 시내로 들어와 간식으로 닭갈비 주먹밥을 받아 먹고, 이중섭 거리에서 그의 생가를 보며 그 작은 방 한 칸에 놀랐다. 그에 반해 서래마을 길처럼 단정하고 점잖게 정비한 이중섭 거리에서, 도시 사람으로서 무의식적인 반가움이 느껴지는 스스로가 조금 한심스럽기도 했다. 올레 시장에 도착했을 때는 경로를 이탈해서 시장 구석 구석을 돌았다. H나 내가 딱히 시장 분위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H가 알아둔 통닭 맛집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통닭 주문을 해놓고 오메기 떡집를 찾다 우연히 제주비어 생맥주를 테이크 아웃할 수 있는 집을 그 시장통에서 발견했다. 신이 나서 페트병 하나와 병맥주 하나를 사고 통닭을 찾아서 종점으로 향했다.


점심도 거르고 아침부터 주구장창 걸은 피로가 어깨와 발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종점까지 도착했을 때는 이 코스를 설계한 사람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걷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 패스를 그렸는지 절절하게 느껴졌다. 여기에 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만든 길이 아니다. 이미 거기에 있던 길들이다. 원래 있었던 길에 올레길이라는 의미를 붙이고 리본으로 경로를 표시하며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로 인해 여러가지 영향이 이 구간을 둘러싼 거리에 미쳤을 테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리고 대부분의 올레길을 걸은 사람들에게는 무척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확언할 수 있다. 결국 의미 있는 일이었던 거다, 걸은 사람과 걸어 보라고 온 힘을 다해 이 시스템을 만들고 관리한 사람들 모두에게.


종점에 도착했을 때는 오히려 맥이 탁 풀려, 한시 바삐 숙소로 돌아가 닭을 먹고 푹 쉬고 싶어졌다. 차를 주차한 이마트 서귀포까지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분이 카카오 욕을 하는 걸 들으며, 회사의 누군가가 남긴 문의에 답을 달았다. 놀멍 쉬멍 걸어 왔어도 현실은 여기 그대로 놓여 있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오늘 걸은 이 길에, 걸어온 행위에, 이 통닭과 천국같이 기분 좋은 햇살의 의미가 바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 제주에 있고, 내일도 걷기는 계속된다. 그게 지금 나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