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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홍 May 18. 2016

달동네

2014

우리집은 달동네로 들어서는 어귀에 있었다. 일제시대가 끝날 무렵에 지어졌다고 하는 초등학교와 달동네, 그 사이에 우리집이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던 나는 마찬가지로 동네에서 유치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곤 했다. 무슨 어린이집 같은 게 있던 건 아니고, 그냥 동네를 다니다가 내 또래가 보이면 쭈뼛쭈뼛 이야기를 한두마디씩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여러명이 모이는 일은 별로 없고, 대개는 매일 보는 친구가 한둘쯤 생기기 마련이다.


        집 앞 학교에는 넓은 운동장에 정글짐이나 미끄럼틀 같은 놀이기구가 있어서 으레 그곳에서 놀고는 했다. 남들 유치원 다닐 시절 자주 어울리던 남매가 있었는데, 비가 오는 날에도 뛰어나가서 흙장난이라든지 물장난을 하며 놀았다. 자연히 우리는 같은 학교에 들어갔는데, 두어 해가 지나고 무슨 일인지 그네들은 학교에 다니기를 그만두었다. 집에 화재가 났다고 했던 것 같다. 훗날 별 볼일 없는 대학에 들어가서는, 입학 후 한참 지나서야 그 남매 중 남동생을 우연히 만나는 일이 있었다. 친구라도 만들어볼까 하고 대충 가입한 동아리에서 술을 마시던 날 밤이었는데, 술자리에서 잠시 나와 바람을 쐬던 때 길을 가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허름한 복장에 지저분한 목장갑을 낀 채였다. 서로가 누구라는 것을 깨닫기는 했으나, 아는 체 하지 않은 채 넘어갔고 그 뒤로는 그를 보게 되는 일이 없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달동네로 놀러가는 일이 많았다. 그쪽에 사는 같은 반 친구들이 있기도 했고, 집안끼리 친하게 지내는 집이 있기도 했다. 그때는 주로 닌텐도처럼 텔레비전에 연결하는 오락기를 하러 친구들끼리 많이 놀러갔다. 그러던 와중에, 아마 3학년때쯤,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 성격이 밝았고, 뭘 하러 가자고 먼저 이끄는 타입이었다. 그땐 의식하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그 친구의 얼굴을 생각해보면 화상 흉터가 있던 것 같다.


        그 동네 사람들이 그렇듯 집은 가난했지만, 난 아직 가난이나 부자라는 개념을 몰랐다. 단지 가지고 싶은 것들이 있을 뿐이었고, 외동아들인 내가 집에서 할 일이라고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만화를 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정현이었고, 밑으로 남동생을 둔 장녀였다. 정현이도 같은 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반이 달라서 학교에서 마주친 적은 별로 없었다.


        늘 다니는 곳만 가고 아는 길만 가던 나에게 정현이는 달동네를 구석구석 안내해주었다. 내가 모르고 있던 놀이터로 가자고 하더니, 지름길로 다니면서 누더기같은 집들 사이사이 좁은 길목으로 마구 달렸다. 놀이터에 갈때는 으레 남동생과 같이 가서 셋이서 놀곤 했다. 그렇게 달동네를 쑤시고 다닌 날 밤이면, 뭔가 특별한 꿈을 꾸었다. 같은 동네인데 내가 아는 길은 아니고, 다만 나는 무언가에게서 도망치며 숨기에 바빴다. 작은 절벽을 뛰어내리기도 하고, 발이 언제 빠질지 모르는 스레트 지붕 위를 마구 뛰어다녔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갑자기 휙 하고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고는 했다.


        우리는 놀이터에서 역할극을 하며 놀았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주인공과 악당 캐릭터들을 돌아가면서 맡았다. 주로 으레 아침에 내가 정현이네 집앞에 가서, 정현아 놀자 하고 외치는 걸로 일과가 시작됐다. 혹은 집 안에서 각종 캐릭터 카드나 장난감 나부랭이를 가지고 뭔지 모를 게임을 하며 놀기도 했다. 그 동네 집은 모두 비슷비슷해서, 뭔가 시큼한 냄새가 났다. 처음에는 종종 남동생도 끼고는 했지만, 나중에는 거의 둘이서만 종일 놀다시피 했다.


        연탄을 때서 난방하던 집에 보일러가 들어오면서, 정현이도 더 만나지 않게 되었다. 이사를 간 것도 아니고 싸운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되었다. 어쩌면 정현이가 나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는 걸 알게 된 뒤였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정현이는 학습지를 보고 있었고, 얼굴만 보고서 집을 다시 나와야했다. 묘하게 자꾸 코를 갖다 대고 싶어지는 연탄 타는 냄새 대신 보일러가 연기를 뿜으면서 나는 교복을 입기 시작했다.


        교복을 입으면서는 우리 동네가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에서 달동네를 지나갈 때면 전에 분명 사람이 살던 집인데 폐가가 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혹은 어떻게 저런 집에서 사람이 살았을까 싶기도 했다. 어릴 때의 나는 동네 어른들을 보면 무조건 인사했는데, 더이상 아무에게나 인사를 하지 않기 시작한 무렵도 이때다. 늘 다녀서 알던 길이었지만 다니지 않으면서 알 수 없게 되고 알 필요도 없게 되었다. 재개발을 하면서 새로 생긴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이곳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왜 다를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것은 내가 알 수 없었다. 저 아파트 사람들과 이 동네에서 사는 사람들이 서로 다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정현이를 다시 만난 건 대학을 가서였다. 당시 유행하던 동창 찾기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글을 남겼고, 내 첫 핸드폰으로 연락이 닿았다. 정현이는 우리 대학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학교는 쉬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바다에 나가 계시고, 남동생은 군대에, 자기는 간간이 알바를 하며 지내노라고. 반가워 같이 밥을 먹고 정현이가 사는 원룸으로 갔다.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수건걸이에는 분홍색 브래지어가 걸려있었다. 방에서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편의점 앞 노상 파라솔에서 같이 밤늦게 술을 마시고, 내가 있던 기숙사 통금을 핑계로 원룸에 갔을 때에도 그 냄새는 방안에 가득했다. 불꺼진 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정현이의 얼굴을 비췄고, 오른뺨에 아직 남은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그 자국은 그대로였는데 왜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닐까. 이상하다. 긴 다리가 나를 누르면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모든 것이 가벼워지고 쉬워졌다. 어차피 정해진 답이 없고 답을 구할 필요도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를테면 어릴때 어울리던 그 남매가 어디로 갔는지, 혹은 지금 내가 아는 정현이 정말 내가 어릴때 놀던 그 친구인지 하는 의문. 또는, 우리집은 달동네에 속하는지 아니면 그 밖인지. 이런 의문들은 그 방으로 들어가면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더운 여름에 그 방의 작은 벽걸이형 에어컨은 시원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나는 가루세제를 사러 나갔다가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을 알았다. 시간이 언제인지는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정현이네 방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그랬던 것처럼 옆에 누웠을 때, 아마도 잠에서 깼겠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 기척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일어났을 때는 나 혼자였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큰 공포를 느꼈다. 나중에 학원에서 돌아온 정현과 함께 점심을 먹었지만, 여느때와 달리 서로 말이 없었다.


        두어 달이 지난 후 정현은 반수를 해서 다른 지방의 대학교를 들어갔고, 나는 군대에 갔다. 평택에 있는 부대에서 야간 근무를 서던 어느날 밤, 잘 보이지도 않는 별을 보며 문득 정현을 생각했다. 휴가를 나왔을 때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어딘가 사람이 많은 곳 같았고, 바쁘니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휴가는 다시 여름이었다. 쨍한 햇볕 아래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고 길을 걸으면서, 땀냄새에 옷을 다시 빨아야겠다고 느꼈다. 처음으로 섬유유연제를 사서 세탁기를 돌려보았다. 이런 것이었구나. 이런 거라면 누구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그 남매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든, 정현이가 무얼 하고 있든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대용품이 될 수 있을거야. 그렇게 냄새가 좋은 옷을 입고 나는 어느 술집으로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본 친구가 여자를 한명 소개해주었는데,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익숙한 냄새였다. 사람이 가득한 주말 저녁 시내에서, 혹은 그날 그 브래지어에서 났던 냄새가 고기 굽는 연기와 섞였다. 어머 너무 재미있다. 소주를 넘기면서 시간이 갔다. 그 여자와 팔짱을 끼고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를 걸었다. 가로등 밑 쓰레기더미에선 역한 냄새가 났다. 노란 불빛이 진하게 앉은 그 여자의 얼굴은, 조금 전 나와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던 그 사람이 맞는 건가. 하지만 도중에 사람이 바뀌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여자는 길을 가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아, 나 안될 것 같다. 순간 냄새가 약간 달라진 것 같았다. 여름은 더웠다. 팔을 잡고 걸음을 재촉해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커버 사진: http://markjuhn.com/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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