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람에 풀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카론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흐릿하던 시야가 서서히 선명해지고, 낯선 노인의 얼굴이 보였다. 노인의 이마와 눈가에는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그녀는 겉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이웃집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신비로운 무지갯빛을 띠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품은 지혜와, 이 세상 모든 슬픔을 감싸는 자비가 고요한 별빛처럼 스며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옆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 두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 도로를 건너오던 그 고양이들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들었구나. 난 아이리스야.”
그녀는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덧붙였다.
“사람들은 나를 ‘무지개의 여신’이라고 부르더군… 자네는 이름이 뭐지?”
카론은 짧은 숨을 들이켜고 대답했다.
“… 카론입니다.”
아이리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카론이라… 참 흥미로운 이름이군.”
카론은 고개를 들어 노인과 고양이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개는 움직이는데 이상하게 아무 감각이 없었다. 아프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 여긴 어디죠?” 그가 묻자, 아이리스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자, 일어나 보게. 천천히….”
그녀의 말에 따라 몸을 일으켜 앉은 카론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헉!…”
그의 시선이 멈춘 곳, 도로 옆 풀숲에 자신의 몸이 누워 있었다.
그 몸은 머리가 깨졌는지 얼굴이 피로 물들어 있었고, 찢긴 옷엔 흙과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저기 누워 있는데, 자신은 이렇게 멀쩡하게 앉아 있다니….
그는 자신이 유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가슴에 손을 얹어 보니 쿵쾅거리며 뛸 심장은 작은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그는 두려움에 휩싸여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꿈이길…’
악몽에서 깨길 바라며 눈을 떴지만 눈 앞의 광경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생생했다.
카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죽은 건가요…?”
아이리스도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지는 않았어. 코마에 빠졌지. 내가 자네 몸에서 영혼을 잠시 꺼낸 거야.”
카론은 너무 큰 충격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두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검은 고양이는 눈을 살짝 감았고, 흰 고양이는 꼬리를 흔들며 카론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얘들을 구해주고 대신 트럭에 치였다며?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녀가 고양이들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네. 저 몸으로 다시 돌아가 누군가에게 발견되든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카론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여기서 이 녀석들과 함께 내 일을 도와주든지….”
카론은 숨을 멈추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제안은 너무나 황당했지만, 카론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 몸으로 돌아가 누군가에게 발견되든지…’라는 그녀의 말은, 곧 자신의 생사가 타인의 손에 달렸다는 의미였다. 카론의 머릿속에 지난 3년간 침대에 누워 눈 한 번 뜨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도 그렇게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 결국 죽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카론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무지개의 여신 아이리스’라 칭한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의 머릿속은 마구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이 모든 게 꿈일 거야’ 생각하고 몇 번을 눈을 감았다 떠 봤지만, 눈앞의 할머니와 고양이들은 너무나 또렷하고 생생했다.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
“저는…”
아이리스는 조용히 카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일이 뭔데요?”
‘하겠습니다’라는 대답 대신 ‘무슨 일이냐?’는 카론의 질문에 한순간 당황한 그녀가 금세 표정을 바꾸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녀석들은 소울 가이드야. 죽은 사람이나 고양이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지. 소울 가이드는 사람과 고양이가 한 팀을 이뤄 활동해. 마침 요 녀석들의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자네가 이 일을 맡아 무사히 마치면…”
그녀는 말을 멈추고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몇 초 동안 뜸을 들인 후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다시 깨어나게 해 줄 수도 있어.”
그녀의 파격적인 제안에 카론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코마에 빠져 침대에 누워 있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지난 3년간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던 무력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소울 가이드가 돼서 누군가의 마지막을 함께해 주고, 코마에서 깨어날 수 있다면…’
실타래처럼 엉킨 머릿속 매듭이 한 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생각이 정리되고, 결심이 서자 카론은 재빨리 대답했다.
“…해 보겠습니다.” 마치 퀴즈쇼에서 시간이 초과되면 오답으로 처리되는 걸 아는 참가자가 3… 2… 1… 소리에 “정답!”을 외치는 것 같았다.
아이리스의 눈가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그녀 옆에 앉은 고양이들도 큭큭대는 것 같았다.
그녀가 고양이들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새 파트너가 생겼구나. 그런데 좀 어리바리한 것 같기도…”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벙찐 표정을 짓는 카론을 향해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가 “낄낄낄” “깔깔깔” 웃었다. “야옹”이나 “냐~옹”이 아닌, 예상치 못한 녀석들의 웃음소리에 깜짝 놀란 카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을 보던 아이리스가 ‘씨익’ 웃고,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그 순간, 주변이 밝은 빛으로 물들었다. 카론의 눈앞에 있던 풀잎과 나무, 장난기 가득한 할머니와 사람처럼 웃던 고양이들이 점점 흐려지다가 모든 것이 하얗게 사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카론은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불빛은 안개처럼 희미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투명한 냉동 캡슐이 놓여 있었다.
‘이건 뭐지?’ 하고 고개를 숙여 바라본 캡슐 안엔 그의 몸이 누워 있었다.
핏자국은 사라져 있었고, 얼굴은 평화로웠다. 카론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때 허공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 자신의 영혼을 들었다 놨다 했던 그 목소리였다.
“자네 몸은 여기 잘 보관해 두겠네. 걱정 말게. 저 몸이 다시 필요해지는 날까지 안전하게 잠들어 있을 테니….”
카론은 캡슐 안에 잠든 자신의 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벽 쪽에 보이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올라가니 거실이 보였다.
벌써 저녁이 되었는지 베란다 통창으로 스며들어 온 붉은 노을이 거실을 부드럽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소파에 아까 그 고양이들이 앉아 있다가 카론을 향해 앞발을 흔들었다.
‘어서 오라’는 손짓 같았다. 카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천천히 걸어 녀석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순간, 하얀 고양이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고마웠어요.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요.”
카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양이가 말을 하다니?”
카론의 당황한 표정을 본 검은 고양이가 흰 고양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거봐! 놀랄 거라고 했잖아. 먼저 야옹이라도 하고 말하라고!”
카론은 놀란 눈을 깜빡이며 말을 더듬었다.
“너, 너희들 뭐야? 어, 어떻게 사람 말을 하지?”
검은 고양이가 조그만 입을 열었다.
“우린 소울 가이드예요. 그래서 사람 말을 할 줄 알아요. 놀라셨겠지만, 곧 익숙해지실 거예요.”
흰 고양이가 활기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까 아이리스가 말했잖아요. 우린 죽은 사람이나 고양이의 영혼을 마지막 쉼터까지 안내하는 일을 해요. 아저씨가 우리의 새 파트너예요.”
카론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고양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쏠이고 얘는 넬이에요.”
넬이라 불린 흰 고양이가 냉큼 이어받았다.
“저희는 어제까지 잭슨 아저씨와 함께 일했어요. 바로 저분이에요.”
넬이 앞발로 장식장의 사진을 가리켰다. 사진 속에는 마흔 살쯤 돼 보이는 흑인 남성이 클래식카 같은 고물 픽업트럭 앞에서 찍은 사진이 보였다. 쏠과 넬은 보닛 위에 올라가 앞발을 들어 ‘짧디 짧은 V’를 하고 있었다.
쏠이 자부심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정말 환상적인 팀이었어요. 잭슨 아저씨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지혜로운 분이셨죠. 그런데 오늘 아침에 천국으로 가셨어요. 그래서 후임자가 필요했는데… 마침 미스터 카론이 나타난 거예요. 마치 운명처럼요….”
넬이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앞발을 내밀었다.
“우리 잘 해봐요. 미스터 카론.”
카론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쏠도 앞발을 내밀었다. 녀석들의 두 발과 카론의 오른손이 포개졌다.
고교 시절 농구선수로 뛰었던 카론이 습관적으로 ‘위로? 아래로?’ 고민할 때 쏠이 앞발을 쏙 빼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아이리스가 미스터 카론의 이름이 흥미롭다고 한 게 무슨 뜻이에요?”
카론은 아쉬운 듯 한 박자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아! 아까는 나도 잘 몰랐는데 너희들 얘기 들으니 알겠어. 카론은… 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뱃사공이야. 죽은 사람의 영혼을 배에 태워 스틱스 강을 건네주지.”
카론은 어릴 적 아버지가 잠자리에서 읽어주던 그리스 신화 동화책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죽은 자의 영혼을 강 건너편으로 실어 나르는 ‘뱃사공 카론’ 이야기를 좋아했다.
귀에 인이 박이게 들은 이야기 때문인지 카론은 가끔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찾아보곤 했다.
카론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윌로 릿지 캠핑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망설이고 쭈뼛거리다가, 캠핑장 옆 강에서 좋아하는 마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숫기가 없어 어머니에게 다가서지 못하던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나룻배를 빌려 노를 쥐어줬고, 팔뚝에 핏줄이 터지도록 노를 젓는 아버지의 모습에 반한 어머니가 입술을 내밀고 달려들었다고, 그래서 아들을 낳았을 때 ‘카론’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다만, 신화 속 뱃사공 ‘Charon’은 어둡고 무서운 이미지이니, 밝고 따뜻한 느낌을 담아 ‘Karon’으로 지었다고 아버지의 노트에 써 있던 게 기억났다.
“그런데…”
카론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 생각을 지우려는 듯, 손으로 허공에 알파벳을 쓰며 덧붙였다.
“신화 속 카론은 Charon, 즉 Ch로 시작해. 나는 K로 시작하는 Karon이고… 발음은 비슷한데 철자가 달라.”
넬이 꼬리를 흔들며 말했다.
“어쨌든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우리가 영혼을 건네주는 강도 스틱스 강이거든요”
순간 카론의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졌다.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떨결에 자신의 뺨을 꼬집었지만 살갗이 당겨지는 느낌도, 따끔한 자극도 없었다. 그는 “꿈은 아니구나!”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람의 말을 하는 고양이들과 함께 영혼을 안내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더구나 영혼을 건네주는 강이 신화에 나오는 스틱스 강이라니….
복잡한 표정의 카론을 가만히 지켜보던 쏠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름도 그렇고, 뭔가 묘하게 딱딱 맞아떨어지는걸….”
그때였다.
“칭! 치잉~!” 쏠의 목에 걸린 방울이 맑게 울리고, 곧이어 넬의 방울이 “부르르! 부르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고양이다!”
“멀어! 서둘러야 해!”
쏠과 넬이 동시에 소리치며 현관 쪽으로 몸을 날렸다.
카론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 순간, 현관 문턱을 넘던 쏠이 뒤돌아보며 외쳤다.
“미스터 카론, 어서 와요! 출동이에요!”
넬도 다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가면서 설명해 줄게요! 거리가 멀어서 뛰어야 해요!”
카론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당최 뭐가 뭔지?… 일단 따라가 보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고양이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