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게이트하우스의 아침

by 부지깽이

카론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3년 동안 코마 상태였어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고, 찻잔을 감싸 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 속에는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감과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윌로 릿지 마을로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차가 고장 났어요.”

아이리스는 살며시 눈을 감았고, 쏠과 넬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론은 쏠과 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얘들이 길을 건너는 게 보였어요.”

잠시 말을 멈춘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트럭이 너무 빨리 달려왔어요. 저는 그냥 몸이 먼저 나갔어요.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찻잔을 든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카론을 보며 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미스터 카론 덕분에 저희가 살았어요.”

“아니야!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카론은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었다.

아이리스가 허브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그 같은 상황에서 고양이들을 구하려고 뛰어드는 사람은 거의 없어.”

카론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그럼 혹시 그곳에 가면, 제 배낭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 트럭 기사가 신고했겠네요.”

넬이 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미스터 카론을 친 트럭 기사는 나쁜 사람이었어요. 차에서 내려 다가왔을 때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어요. 카론이 죽은 것 같자 배낭과 휴대폰, 신분증을 챙겨서 그대로 도망쳤어요.”

넬의 목소리에는 그날의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쏠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카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찻잔을 든 손이 덜덜 떨렸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리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세상엔 자네처럼 착한 사람도 있지만, 그 운전자처럼 나쁜 사람도 많아.”

카론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얼굴은 절망과 분노가 뒤섞여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집에 가서 푹 자고, 내일 늦지 않게 오렴.”

그녀의 말에 쏠과 넬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카론도 멍한 얼굴로 따라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아이리스.”

카론이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녀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셋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잠깐!” 그녀가 벽에 걸린 작은 손전등을 떼서 내밀었다.

“숲길은 어둡고 위험해. 이걸 들고 가.”

카론이 그것을 받아 버튼을 누르자 ‘딸깍’ 소리가 나면서 노란 불빛이 어둠을 밀어냈다.


그 순간, 숲 어딘가에서 오싹한 속삭임 같은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쏠과 넬이 동시에 귀를 쫑긋 세우더니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루어들인가?” 쏠이 낮게 중얼거렸다.

“루어? 낚시할 때 쓰는 가짜 미끼 말하는 거야?”

카론이 묻자 등 뒤에서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말거라. 아직은 멀리 있으니… 하지만 잊지 마라.”

뒤돌아선 카론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카론! 잘 들어. 스틱스 강 아래 깊은 동굴에 내가 오래전에 봉인해 둔 악마가 있어. 쉼터로 향하는 영혼들을 잡아먹던 사악한 놈이지. 그놈을 깨우려는 하수인들이 바로 루어야. 악마가 삼켰다가 뱉어낸 찌꺼기인데 피처럼 붉은 입술에 박쥐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면서 길 잃은 영혼, 죄 많은 영혼들에게 다가가 속삭이지. ‘천국보다 좋은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그렇게 영혼을 꾀어내 악마에게 바치는 비열한 놈들이야.”

아이리스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카론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잊지 마, 카론! 소울 가이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카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발길을 돌렸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숲길은 달빛 아래 잠들어 있었다. 카론이 든 손전등 불빛이 나무 그림자에 파묻힌 어둠을 밀어냈다.

“그런데….” 카론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아이리스가 내일 다시 오라고 했잖아? 무슨 뜻이야?”

발레리나처럼 사뿐사뿐 걷던 넬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쉼터에 온 영혼이 2층에서 하룻밤 푹 쉬고 다음날 깨어나면… 소울 가이드들은 그 영혼을 배에 태워 스틱스 강을 건네줘야 해요”

“나룻배 같은 걸 타고?”

“아뇨. ‘펀트’라는 배가 있어요. 바닥이 평평한 작은 배인데, 긴 장대로 강바닥을 밀어서 움직여요.”

“내일 보면 알 거예요.”

쏠이 속삭이듯 덧붙였고, 카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이 끝나고 붉은 벽돌로 지은 작은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쏠과 넬이 파트너와 함께 사는 보금자리, ‘게이트하우스’였다.

집 뒤편으로 ‘무지개의 여신’ 아이리스가 사는 영혼들의 마지막 쉼터로 갈 수 있는 신비로운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집을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소울 가이드들은 이 집을 ‘게이트하우스’라고 불렀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 외곽에 위치한, 겉으로 보기엔 영락없는 외딴 빈집이었다.

마당 잔디밭엔 잡초가 듬성듬성 나 있었고, 대문 옆에 허름한 차고가 딸려 있었다.

카론이 현관문을 열자 넬이 허겁지겁 거실로 뛰어들었다.

넬은 수줍은 듯 구석에 있는 고양이 화장실로 사라졌고, 쏠은 느릿느릿 걸어 카론 앞에 섰다.

“미스터 카론은 저 방 쓰시면 돼요.”

쏠이 앞발을 들어 주방 옆 침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까지 잭슨 아저씨가 쓰던 방인데요, 떠나기 전에 깨끗이 청소해 뒀어요.”

카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실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희는 어디서 자니?”

“우린 저기요!”

쏠이 가리킨 곳은 베란다 옆 캣타워 아래 작은 바구니 두 개였다.


침실로 들어가려던 카론이 멈칫하더니 걸음을 돌려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어느새 쏠 옆에 다가온 넬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쏠이 고개를 저으며 작게 말했다.

“그냥 놔 둬. 아직 혼란스러울 거야.”

카론은 냉동 캡슐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올라왔다.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운 그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카론은 축 늘어진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터벅터벅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나온 그는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그 소리에 놀라서 깬 넬이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아이구! 아직 두 시간은 더 자도 되는데….”

쏠이 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놀렸다.

“누가 잠꾸러기 아니랄까 봐!”

아침부터 투닥대는 둘을 쳐다보던 카론이 웃음을 터뜨렸다.

“미스터 카론! 잘 잤어요?”

쏠의 경쾌한 인사에 카론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응, 아니…”

넬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응, 아니는 뭐야?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쏠이 넬을 흘기며 카론에게 다가왔다.

“미스터 카론! 저희 사료 좀 주세요.”

“응? 어딨는데?”

“주방 가운데 선반에요.”

카론은 주방으로 가서 사료 봉지를 들고 나왔다.

바삭바삭한 사료 알갱이들이 봉지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캣타워 옆에 놓인 두 개의 밥그릇에 사료를 가득 붓고,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 뚜껑을 열어 물그릇도 채워줬다. 그리곤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양이 화장실도 척척 정리했다.

사료를 오물거리던 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미스터 카론! 고양이 키워본 적 있어요?”

“응, 아니… 글쎄, 키워봤다고 해야 하나?”

이곳에 오기 전에 동물보호센터에서 일했던 일이 떠올랐지만, 꼬치꼬치 얘기하고 싶진 않아 입을 다물었다.


카론은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문득 간밤에 아이리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영혼 상태지만, 몸을 가진 것처럼 움직여야 하니까 가끔 따뜻한 차 한 잔씩 마셔.’

그는 주방 선반을 열고 마실 만한 게 있는지 찾아봤다. 맨 왼쪽 선반 구석에 믹스커피 박스가 보였다.

카론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머그잔에 믹스커피를 타서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아침식사를 마친 쏠과 넬도 소파 위로 뛰어올라 카론 옆에 앉았다.

쏠이 앞발을 들어 소파 옆 탁자에 올려진 LP 플레이어를 ‘톡’ 눌렀다.

‘지지직~’ 바늘이 판을 긁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사랑처럼, 가슴 저미도록 설레면서도 왠지 모르게 쓸쓸한 선율이 셋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루마의 『너에게로 흐르는 강(River Flows in You)』이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고, 다 돌아간 LP판이 ‘틱, 틱~’거리자 꾸벅꾸벅 졸던 넬이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쏠이 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핀잔을 줬다

“야! 밤에 잠 좀 자라니까… 너 또 마당에 나가 달 구경했지?”

“흥! 남이사 달을 보든, 별을 세든~”

둘의 투닥거림에 미소 짓던 카론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쉼터에는 언제 가야 해? 어제 데려온 영혼 보내줘야 한다면서?”

“점심 전에만 가면 돼요. 영혼을 깨우는 건 아이리스의 일이니까요.”

넬이 느긋하게 대답하자 쏠이 덧붙였다.

“보통은 10시쯤 깨우는데… 새끼 고양이라 더 오래 재울 거예요.”

카론은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작은 바늘이 8자에 닿으려 하고 있었다. 아직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넬이 앞발로 작은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고 있을 때, 카론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얘들아, 지금 가자. 집안에만 있으니 숨 막혀. 스틱스 강도 보고, 펀트도 보고… 쉼터도 한 바퀴 둘러보자.”

그의 목소리에는 전날의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쏠과 넬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예? 지금요? 잭슨 아저씨는 열 시 넘어서 슬슬 움직였는데…”

넬이 졸린 눈을 비비며 투덜댔다. 쏠도 고개를 갸웃하더니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미스터 카론, 좀 피곤한 스타일인 듯…”

넬이 혼잣말하듯 속삭였다.

“성격이 급한 건지, 준비성이 철저한 건지…”

둘이 수군대고 있을 때였다.


“얘들아, 허리 업!”

뒷마당에서 경쾌한 외침이 터졌다.

쏠과 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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