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론이 뒷문을 열자, 숲에서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밤새 이슬에 젖은 숲은 아침햇살을 듬뿍 받아 안개를 밀어내고 있었다.
카론은 신비로운 숲길을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쏠과 넬은 덜 마른 풀잎에 발이 젖는 게 싫은지, 카론의 발자국이 찍힌 곳으로 폴짝 폴짝 뛰면서 키득거렸다. 숲속 깊이 들어갈수록 나무들은 우람해졌고, 그늘은 짙어졌다.
십여 분쯤 걸었을까? 폴짝폴짝 뛰던 넬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미스터 카론! 조금만 더 가면 스틱스 강이에요.”
잠시 후 안개 사이로 서늘한 물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숲이 스르르 갈라지고, 검푸른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틱스 강은 카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
어슴푸레하게 윤곽만 드러낸 건너편 강둑은 마치 다른 세계처럼 아득해 보였고, 수면 위에 낮게 깔린 안개는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것 같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카론은 강가에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 작은 배 수십 척이 보였다.
크고 작은 펀트들은 마치 안개 속에 잠든 것처럼 정박해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뱃머리엔 소울 가이드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엘리 & 루비’
‘조슈아 & 토비’
‘마르셀로 & 버터’
펀트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는 듯했다. 수많은 영혼들을 강 건너로 인도했을 그 배들은, 소울 가이드들의 고단하고 숭고한 역사를 보여주는 듯했다.
카론은 그 앞에서 알 수 없는 숙연함을 느꼈다.
펀트들 사이를 걷던 카론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한 척의 배가 마치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요하게 떠 있었다.
그 배의 겉면은 흠집 하나 없이 다듬어진 나뭇결이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그리고 뱃머리에 세 개의 이름이 멋지게 새겨져 있었다.
Karon & Sol & Nell.
그것은 분명 아이리스가 잭슨의 이름 대신 새겨 넣은, 이제 막 태어난 새로운 소울 가이드 팀의 이름이었다. 카론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펀트를 바라보았다.
뱃머리에 새겨진 그 이름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마치 셋의 새로운 여정을 알리는 깃발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Karon & Sol & Nell’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쓸었다.
손끝에 닿는 나무의 매끄러운 감촉에서 알 수 없는 책임감이 전해지는 듯했고, 자신이 소울 가이드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이게 우리 배예요.”
넬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잭슨 아저씨랑 타던 건데 이젠 미스터 카론과 함께 타야죠.”
카론은 조심스럽게 펀트에 올랐다. 오래된 나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뱃머리 난간에 작은 글씨로 ‘Sol’, ‘Nell’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여기가 저희 지정석이에요.”
넬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배 안엔 선배 소울 가이드들의 손때가 묻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카론은 구석에 놓여 있는 길다란 장대를 들어 쥐어봤다. 장대는 생각보다 묵직하면서도 손에 착 감겼다.
손끝에 닿은 나무의 감촉이 거칠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치 이 장대를 먼저 쥐었던 소울 가이드들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는 듯했다.
“이걸로 강바닥을 밀어서 간다는 거지?”
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가에 도착해 카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넬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쉼터로 안내한 영혼을 이 배에 태워 강을 건네주면 돼요. 강을 건너는 데는 20분쯤 걸려요. 짧지도 길지도 않죠.”
쏠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영혼들은 배에 타면 대부분 겁을 먹어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두려움에 떨다가… 아주 가끔은 배에서 뛰어내리려는 영혼도 있어요.”
예상치 못한 말에 카론의 얼굴이 굳었다. 영혼들이 느끼는 막연한 공포가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누워 있는 냉동캡슐을 떠올렸다. 알 수 없는 곳에서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자신도, 이 배 위에서 두려움에 떨던 영혼들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론의 표정을 읽은 쏠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타는 거예요. 영혼이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해 주는 게 우리 일이거든요.”
그 말에 카론은 자신의 역할이 단순한 뱃사공이 아니라는 것과, 자신이 짊어질 소울 가이드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강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걸어 쉼터로 올라온 셋은 살며시 카페 문을 열었다.
밤새 싸늘하던 공간은 진한 커피 향과 고소한 빵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테이블들엔 오늘 스틱스 강을 건널 소울 가이드들과 사람 혹은 고양이들의 영혼이 앉아 있었다. 어젯밤 이곳에 도착해 하룻밤을 쉰 이들이었다.
어떤 영혼은 이별의 슬픔에 잠겨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또 다른 영혼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오늘 시작될 새로운 여정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담겨 있었다.
그 시각, 카운터 안쪽 주방에서는 아이리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프라이팬에 퍼진 계란반죽이 채 익기도 전에 뒤집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넬이 앞발로 입을 가리고 킥킥댔다.
“어휴, 또 덤벙대시네….”
셋이 다가가자 그녀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확 퍼졌다.
“얘들아! 마침 잘 왔다! 일손이 모자라 죽는 줄 알았지 뭐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카론이 벽에 걸린 앞치마를 능숙하게 두르며 말했다.
쏠과 넬도 재빠르게 서빙 카트를 밀며 테이블 사이를 요리조리 오갔다.
“오늘 오믈렛 진짜 맛있어요~ 리필은 안 돼요,”
“쿠키는 두 개씩, 고등어는 한 마리씩이에요!”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일했던 것처럼 넷의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쁜 시간이 지나고, 소울 가이드들이 하나둘 영혼을 데리고 스틱스 강으로 내려가자 카페 안이 차츰 조용해졌다.
“휴…”
카론이 앞치마를 벗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쏠과 넬도 그 옆에 앉아 앞발을 툭툭 털었다.
잠시 후 아이리스가 시원한 차와 우유를 쟁반에 담아 다가왔다.
“다들 수고 많았어. 오늘은 너무 바빠서 내가 혼났지 뭐냐…”
그녀는 앞치마로 눈가에 고인 땀을 닦으며 셋의 맞은편에 앉았다.
넬이 조그만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댔다.
“아이리스! 진짜 요리사 영혼 하나는 채용해야 해요. 바쁠 땐 정말 전쟁터가 따로 없다니까요.”
쏠도 팔짱을 낀 채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야. 우리 없으면 어쩌시려고….”
그때, 2층 계단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어제 어렵게 찾아 데려온 새끼 고양이의 영혼이 살금살금 내려오고 있었다. 쏠이 얼른 일어나 꼬리를 흔들며 달려갔다.
“잘 잤니?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
새끼 고양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며 테이블에 와서 앉았다. 아이리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작은 코코아 그릇을 가져와 앞에 놓아주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래~ 큭큭!”
넬이 입을 가리고 웃자, 쏠이 창밖을 보는 척하며 꼬리를 들어 넬의 등을 찰싹 때렸다.
새끼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코코아를 맛있게 핥았다. 짧은 생애 동안 처음 맛보는 달콤한 온기에, 어제 겪었던 잔혹한 공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녀석은 앞발로 그릇을 살짝 붙잡고,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넬을 힐끗 째려보던 아이리스가 새끼 고양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멋진 아저씨랑 오빠가 널 강 건너까지 데려다줄 거야. 거기서 무지개 다리를 건너렴. 이 세상에서의 일은 다 잊고, 즐겁고 따뜻한 세상으로 가렴.”
“감사합니다, 할머니! 그런데 여기 이 예쁜 언니는 같이 안 가나요?”
새끼 고양이가 앞발로 입을 막고 큭큭거리는 넬을 보며 천진난만하게 묻자, 아이리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얘는 부엌데기야. 설거짓거리가 산더미인데 어딜 가겠니?”
그녀의 말에 넬이 어이없는 웃음을 토해내자, 카페 안은 유쾌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새끼 고양이가 접시를 들어 코코아를 다 핥자 쏠과 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 카론도 천천히 일어났고, 아이리스가 넷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넷은 조용히 문을 나섰다. 강에서 불어온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그들은 오솔길을 내려가 강가에 매어둔 펀트에 올랐다.
쏠과 넬이 새끼 고양이를 가운데 두고 뱃머리에 앉자, 카론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장대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가 장대를 강물에 넣고 바닥을 힘껏 밀자, 펀트가 미끄러지듯 물 위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새끼 고양이는 긴장되는지 계속 심호흡을 했다. 녀석의 작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쏠은 앞발로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 넬도 계속 말을 걸어 녀석을 안심시켰다.
둘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에 녀석은 평안을 되찾고 더 이상 떨지 않았다.
잠시 후 그들이 탄 펀트가 강 건너편에 도착했다.
쏠은 녀석의 볼을 쓰다듬었고, 넬은 코끝을 맞대고 작별 인사를 속삭였다. 카론도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줬다.
잠시 망설이던 새끼 고양이가 펀트에서 폴짝 뛰어내려 조심조심 무지개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녀석은 다리 앞에서 뒤돌아서 셋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앞발을 흔들었다. 그리고 뒤돌아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 셋은 펀트 위에 서서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과 발을 흔들었다.
그때 그들의 배 옆으로 또 다른 펀트 한 척이 조용히 다가와 멈췄다.
그 배 안엔 사람의 영혼이 타고 있었다.
잠시 후 쏠과 넬, 카론이 자리를 바꿔 펀트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으아악!!!”
징검다리 쪽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