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걷히고 아침 햇살이 거실을 비추자, 집 안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카론은 평소보다 늦게 잠에서 깼다. 간밤의 복잡한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의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이리스의 제안을 받고 임무를 마치면 돌아가기로 결심했지만,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와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곳에서 보낸 날들이 벌써 익숙해진 걸까?
소울 픽업을 타고 영혼을 찾아 헤매고, 펀트를 저어 스틱스 강을 건너고, 쏠과 넬의 아웅다웅에 웃고, 아이리스의 인자한 배려에 감동 받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몰라’ 하는 낯선 생각까지 들었다.
긴 고민 끝에 카론은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거나, 섣불리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묵묵히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그는 아침이면 쏠과 넬의 집사가 되어 움직였고, 소파에 앉아 따뜻한 커피로 마음을 데우면서 LP 장식장에서 고른 오래된 음악을 들었다. 그의 시간은 마치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게 흘렀다.
쏠과 넬은 카론의 복잡한 내면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가 무슨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둘의 시선은 단순했고 마음은 간절했다. 녀석들은 카론이 어서 임무를 마치고 코마에서 깨어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물론 그와 헤어지는 게 많이 슬프고 아쉬울 것 같았지만….
쏠은 졸리면 카론의 발등에 머리를 대고 낮잠을 잤고, 넬은 앞발로 그의 청바지 끝 솔기를 뜯으며 놀았다.
녀석들의 작은 행동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마음이 카론을 미소 짓게 했다.
카론이 이곳에 오기 전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영혼은 이제 둘뿐이었다.
아이리스가 말한 대로 일곱 번째 영혼을 인도하면 그는 선택권을 얻을 것이었다.
그날 이후 쏠과 넬의 작은 귀는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언제쯤 방울이 다시 울릴까? 그들은 매일매일 방울 소리를 기다렸다. 방울 소리가 울리고 영혼을 찾아 강을 건네주면 카론은 또 한 걸음 ‘돌아갈 곳’에 가까워질 터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방울은 며칠 동안 울리지 않았다.
쏠은 자신의 목에 걸린 방울을 계속 만지작거렸고, 넬은 자신의 방울을 일부러 흔들어 보았다.
카론은 녀석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온하기만 했다.
어색한 침묵을 못 참는 넬이 카론이 들으라는 듯 일부러 목청을 높여 입을 열었다.
“쏠! 작년에 며칠 동안 방울이 안 울렸었지?”
“닷새였지 아마? 네가 좀 쑤신다고 놀러 가자는 걸 잭슨 아저씨가 말렸잖아!”
넬의 의도를 대번에 간파한 쏠이 빙그레 웃으며 목소리 톤을 높여 맞장구를 쳤다.
녀석들은 그렇게 속 보이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카론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할 뿐이었다.
셋은 낮이면 소파에 앉아 LP판을 바꿔가며 음악을 들었다.
카론은 주로 클래식이나 재즈를 틀었고, 쏠과 넬은 처음에는 시큰둥했지만 점차 그 선율에 익숙해졌다.
때로는 넬이 졸다가 앞발로 LP판을 건드려 턴테이블의 바늘을 튕기기도 했고, 쏠은 오래된 음반 재킷의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밤이 되면 셋은 마당에 나가 달을 구경했다. 카론은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쏠과 넬은 그의 발치에 앉아 함께 별을 셌다. 달은 매일 다른 모습으로 떠올랐고, 별들은 금세라도 쏟아질 듯 반짝였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그들의 마음은 더없이 따뜻했다.
달 구경에 싫증나서 별을 향해 앞발을 뻗는 넬의 모습에 카론은 피식 웃기도 했다.
넬은 ‘달 구경’ 멤버가 늘자 내심 좋아하면서도, 귀찮은 척 툴툴대기도 했다.
사흘째 되는 날, 밤이슬이 맺히자 그들은 거실로 들어왔다. 카론은 LP판을 고르다 잠시 멈칫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맥스 리히터의 『온 더 네이처 오브 데이라이트(On The Nature of Daylight)』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을 내렸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 뒤로 한동안 묵직한 음들이 천천히 공간을 채웠다. 현악기의 서늘한 흐름이 벽을 타고 흘렀고, 기억도 없는 슬픔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 선율은 마치 잊고 있던 오래된 상처를 건드리는 듯했다.
카론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꺼풀 아래로 희미한 잔상들이 스쳐 지나갔고, 가슴 한켠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
쏠과 넬도 음악감상에 집중했다. 쏠은 카론의 무릎 위에 앉아 몸을 웅크렸고, 넬은 그의 발치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녀석들의 작은 몸은 음악의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는 듯 미세하게 떨렸다.
거실에 음악이 흐를 때는 늘 따뜻한 온기가 셋을 감쌌다. 말없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듯, 그들은 조용히 같은 리듬으로 숨을 쉬었고, 게이트하우스는 음악과 함께 깊은 밤의 정적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흘째 되는 날 오후.
드디어 “딸랑!”
긴 정적을 깨고 쏠의 방울이 짧게 울렸다. 순간, 셋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넬의 방울도 미세하게 떨렸다. 진동은 희미했지만, 넬은 감각을 더듬어 거리를 계산했다.
“꽤 먼 곳이에요. 도시 쪽…”
카론은 벌떡 일어나 소울 픽업의 키를 챙겼다. 그의 얼굴엔 미묘한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자, 가자!”
소울 픽업은 게이트하우스를 벗어나 도심을 향해 달렸다. 신호를 무시하고, 혼잡한 차들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도착한 곳은 고층 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심 한복판이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빌딩들은 검은 그림자처럼 거대하게 솟아 있었다.
내비게이션의 지시를 놓친 카론이 뒤늦게 핸들을 돌리자 쏠이 낮게 외쳤다.
“여기예요!” 끼이이익~ 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소울 픽업이 멈춘 도로 옆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는 경찰차와 구급차 사이로 폴리스라인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 뒤편 빌딩 앞 화단에 누군가의 시신이 흰 천에 덮여 있었다. 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옥상에서 떨어졌나 봐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던 카론이 쏠과 넬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는 차에 있어. 이런 곳은 위험해. 사람들에게 밟힐 수도 있어.”
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에는 카론에 대한 믿음과 함께,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파트너로서의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카론은 조용히 트럭 문을 열고 내렸다.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겁고 조심스러웠다.
카론이 다가갔을 때 화단에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 울음소리, 그리고 취재 카메라의 플래시 터지는 소리들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었다.
그 혼돈 속에 자신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한 남자의 영혼이 보였다. 카론은 그에게 다가가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후회와 미련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폴리스라인 너머,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듯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카론이 나직이 물었다.
“… 이름이 뭐예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 제이미예요. 제이미 킴.”
“자! 이제 그만 가요. 내가 쉼터로 데려다 줄게요.”
“네…” 영혼이 된 자신에게 말을 거는 카론을 보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카론을 따라가면서 몇 번이나 자신의 몸과 한 여인을 돌아봤다.
제이미를 태운 소울 픽업이 혼잡한 도심을 빠져나왔다.
트럭 안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제이미는 조수석에 웅크리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흐느꼈다.
게이트하우스에 도착한 소울 픽업은 천천히 차고에 들어갔다.
차가 멈추고도 제이미는 한동안 내리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공허했고, 얼굴에는 체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카론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우리 좀 걸을까요?”
제이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넷은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카론과 제이미가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걸었고, 쏠과 넬이 그 뒤를 따랐다.
석양에 물들어 가는 숲은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서늘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고,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론이 발걸음을 멈췄다.
“저기서 잠시 쉬었다 갈래요?”
그가 가리킨 곳엔 우람한 느티나무 아래 커다란 너럭바위 하나가 보였다. 넷은 천천히 걸어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넷을 감쌌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그들의 마음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쏠과 넬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제이미는 고개를 떨군 채 깊은 고뇌에 잠긴 듯 보였고, 카론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무릎 위에 포개진 제이미의 손은 아직도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 제이미가 마른 입술을 깨물고 입을 열었다.
그는 가슴 속에 남아있는 슬픔을 토해내듯 긴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