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따뜻한 햇살이 거실을 비추기 시작하자, 쏠과 넬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카론의 방문 앞으로 폴짝폴짝 뛰면서 발소리를 높여 다가갔다. 하지만 굳게 닫힌 방문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배고픔을 참다못한 넬이 발톱을 세워 소심하게 방문을 긁었다.
“그렇게 긁어서 들리겠냐?” 쏠이 속삭였다.
“그럼 어쩌라고? 넌 긁지도 못하면서!” 넬이 쏘아붙였다.
“내가 언제! 비켜 봐… 난 정중하게 노크할 거야.”
쏠이 앞발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는데,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이 깬 카론이 문을 벌컥 열었다.
카론의 푸석푸석한 얼굴에는 간밤에 잠을 설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하룻밤 새 초췌해진 녀석들의 퀭한 눈빛이 그를 단숨에 현실로 불러왔다.
쏠과 넬은 카론의 발치에 바짝 붙어,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녀석들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이어졌고, 카론은 금세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아차! 사료… 내가 엊저녁에 깜빡했지? 미안해. 지금 바로 줄게.”
카론은 곧바로 그릇에 사료를 가득 부어주었고, 쏠과 넬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바삭한 사료 알갱이들이 그들의 작은 입속에서 경쾌하게 부서졌다. 녀석들은 순식간에 사료 그릇을 비웠다.
그사이 물을 갈아주고 고양이 화장실을 청소하던 카론이 피식 웃었다.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똥도 안 쌌네.”
카론의 말에 넬이 부끄러운 듯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미스터 카론! 아침부터 정말!”
쏠은 넬의 푸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입만 오물거렸다.
아침식사를 마친 녀석들은 ‘이제야 살 것 같네’ 하는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카론도 믹스커피를 타서 둘 사이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 향이 거실에 은은하게 퍼졌다. 창밖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그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어제보다 한결 밝아진 그의 얼굴을 보고, 쏠과 넬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열 번 울자 셋은 집을 나섰다. 쉼터로 향하는 숲길은 평소처럼 고요했다.
카론은 묵묵히 앞서 걸었고, 쏠과 넬은 그 뒤를 따랐다.
“특식, 특식….”
넬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작게 중얼거렸다. 카론은 그런 넬을 보며 피식 웃었다.
쉼터에 도착해 카페 문을 열던 넬이 “특식 주…”라고 소리치려다 말을 삼켰다.
셋이 늘 앉던 테이블에는 아이리스와 집사의 영혼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집사는 고양이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고양이의 작은 영혼은 집사의 품에 파묻혀 편안해 보였다.
“어서들 오렴.”
아이리스가 온화한 미소로 손짓했다. 셋은 조용히 테이블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카론은 집사와 눈을 맞추며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은 집사의 품에 안긴 고양이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들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아이리스가 집사와 고양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같은 인연은 흔치 않단다. 저 세상에 가서도 잘 살거라.”
그녀의 축복을 뒤로 하고 그들은 스틱스 강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차례대로 펀트에 올랐다. 카론이 뒤쪽에 서서 장대를 잡았고, 집사가 고양이를 품에 안고 가운데 칸에 앉았다. 쏠과 넬은 늘 앉던 뱃머리 지정석에 자리를 잡았다.
카론이 장대로 강바닥을 밀자, 펀트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집사의 품에 안긴 고양이는 배가 움직이자 두 귀를 바짝 세우고 목을 살짝 움츠렸다.
집사는 말없이 고양이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잠시 후, 펀트는 건너편 강둑에 살짝 부딪히며 멈췄다.
“행운을 빌어요, 카론.”
집사가 카론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고단했던 삶을 마무리하는 안도감과,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설렘이 교차했다.
카론도 그의 손을 꼭 맞잡고, 그의 품에 안긴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너도 잘 가거라.”
집사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펀트에서 내렸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던 집사가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섰다. 위쪽엔 무지개다리가, 아래쪽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두 갈래 길 앞에서 집사의 발걸음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그는 품에 안은 고양이와 가만히 눈을 맞췄다. 고양이는 작은 얼굴을 흔들며 애처롭게 울었다. 집사도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마치 같은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듯, 둘은 한참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넬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는 거지?” 쏠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자 카론이 무언가 떠오른 듯 중얼거렸다.
“같이 가고 싶은 거지… 죽을 때도 함께였는데, 마지막 순간에 헤어지기 싫은 거야.”
그 말에 쏠과 넬이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집사가 고양이를 안은 채 발걸음을 돌려 펀트 쪽으로 걸어왔다.
“혹시…” 잠시 망설이던 집사가 카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녀석과 함께 징검다리를 건너면 안 될까요?”
그의 간절한 목소리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쏠과 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사와 고양이를 바라봤다. 카론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도 말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자신이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그때 넬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무지개다리가 흐려지고 있어요!”
모두 고개를 돌려 무지개다리를 바라봤다. 정말이었다. 선명했던 일곱 빛깔 곡선이 서서히 흐려지고 있었다.
집사가 고양이에게 속삭였다.
“…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따로 건너야 하나 봐.”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감이 스며 있었다. 고양이는 눈물을 가득 머금고 집사를 올려다보며 애처롭게 울었다. 그 모습에 쏠의 앞발이 저절로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침묵을 지키던 카론이 말문을 열었다.
“… 같이 건너세요.”
모두의 시선이 카론에게 쏠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같이 가세요.”
집사의 얼굴에 감동과 감사의 표정이 차올랐다.
“정말… 정말 괜찮을까요?”
카론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규칙은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의 눈빛엔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집사와 고양이는 카론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징검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고양이는 집사의 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발걸음은 희망으로 가득 찬 듯했다.
일곱 개의 징검돌을 하나씩 밟고 나아가는 집사의 발밑에서 검푸른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징검다리를 다 건넌 그들의 앞에 하늘에서 은빛 계단이 천천히 내려왔다.
집사와 고양이는 이 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황금빛 햇살을 머금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쏠과 넬, 카론은 말없이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흐릿해지던 무지개다리도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그만 가자.”
카론이 짧게 말한 뒤, 장대를 짚어 펀트를 돌렸다. 펀트는 고요한 강물을 가르며 반대편으로 향했다.
잔잔한 물살 위로, 셋의 복잡한 감정들이 그림자처럼 드리웠다.
강을 건너는 내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배에서 내린 그들은 쉼터로 가는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테이블 위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구이와 갓 우린 홍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그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화난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셋은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테이블 앞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쏠과 넬은 혹시 자신들이 잘못한 건가 싶어 고개를 푹 숙였고, 카론도 말없이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몇 분쯤 흘렀을까? 아이리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고했어! 그리고… 정말 잘 했어.”
“휴… 다행이다!”
“혼나는 줄 알고 놀랐잖아요!”
쏠과 넬이 동시에 외치며 고개를 번쩍 들었고,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녀석들은 잽싸게 고등어를 들고 통통한 살점을 베어 물었다. 카론도 살짝 웃으며 찻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규칙은 중요하단다. 하지만 가끔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셋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아이리스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단단한 울림이 깃들어 있었다.
“어떤 다리를 건너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 그 간절함이란다. 카론, 넌 그걸 이해하고 그들을 함께 보내준 거야. 규칙보다 중요한 마음을 본 거지.”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쏠과 넬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용기와 책임감이 소울 가이드의 기본 덕목이지만, 그 바탕엔 따뜻한 공감이 깔려 있어야 해. 그런 점에서 카론도, 너희 둘도 정말 잘하고 있어.”
녀석들은 아이리스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했다. 카론도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찻잔을 들어 홍차를 홀짝였다.
그때 쏠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런데, 아이리스! 미스터 카론은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돼요?”
그 순간 무겁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물끄러미 카론을 바라보다가 찻잔을 내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론! 네가 일곱 영혼을 안내하면 선택권을 줄게. 코마에서 깨어나 네가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징검다리를 건너든지….”
쏠과 넬은 카론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카론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쟁반에 빈 그릇과 찻잔을 옮겨 담으며 말했다.
“바로 결정하지 않아도 돼. 충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 자! 이제 집에 내려가서 푹 쉬렴.”
카페를 나온 셋은 함께 숲길을 걸어 게이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아무도 말이 없었다.
쏠과 넬은 몇 번이나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말을 꺼내지 못했고, 카론은 그냥 묵묵히 앞서 걸을 뿐이었다.
집에 도착해 소파에 앉았을 때도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결국 넬이 입을 열었다.
“아휴, 숨 막혀! 미스터 카론, 말 좀 해 봐요! 돌아갈 거죠?”
쏠이 넬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말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지. 그걸 못 참냐?”
“생각이 많은 게 좋은 건 아니잖아!”
넬이 버럭 쏘아붙였다. 둘의 익숙한 티격태격에 피식 웃던 카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야지.”
“그럴 줄 알았어요. 징검다리야 나중에 건너도 되죠!” 넬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때, 쏠이 앞발을 들어 발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까지 안내한 영혼이…?”
넬이 앞발로 쏠의 옆구리를 찌르며 외쳤다.
“다섯이잖아, 멍충아!”
넬이 입을 삐죽이며 놀리자, 쏠이 발끈해서 바로 받아쳤다.
“뭐 멍충이? 입가에 묻은 고등어 껍질이나 떼! 칠칠치 못하게….”
넬이 앞발로 입가를 문지르다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차! 특식! 츄르! 통조림! 아이쿠~ 오늘도 까먹었네!”
쏠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난 안 까먹었는데 분위기가 영… 넌 정말 머리가 나쁜가 봐!”
“흥! 발가락이나 세는 주제에!” 넬이 쏘아붙였다.
둘의 티격태격에 카론이 머리를 싸매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이구! 또, 또 시작이다~ 지금 뛰어가서 받아오든지?”
그는 한마디 툭 던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거실에서 쏠과 넬의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위 바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