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따뜻한 '규칙 파괴자'

by 부지깽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같은 사무실 동료였죠. 예쁘고, 성실하고,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늘 단정한 옷을 입고, 외모를 꾸미는 것엔 큰 관심이 없었어요. 저는 그녀의 그런 수수함이 더 좋았어요.”

제이미의 눈빛에는 그녀를 향한 애틋함과 함께 깊은 그리움이 아른거렸다.

“저는 그저 그녀와 얘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다른 동료들도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었고, 가끔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조차 좋았죠.”

제이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느 날 용기를 내서 당신을 많이 좋아한다고, 사귀고 싶다고 고백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제 프러포즈를 정중하게 거절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너무 가볍다고, 진지함이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어요. 그 말이 제 심장을 찔렀어요. 그래서… 달라지기로 했어요.”

카론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떻게요?”


제이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말수를 줄였어요. 평소 농담도 곧잘 하고 사람들을 웃기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죠. 매일 정장을 입고 출근했고요… 동료들이 이상하게 여겼어요. 걱정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가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여실하게 느껴졌다.

그의 얘기에 귀 기울이던 카론이 물었다.

“그래서요? 그녀는 달라진 당신을 보고 어떻게 반응했나요?”

“없었어요…. 아무런 반응도요. 그래서 더 노력했죠.”

제이미의 눈빛에 허탈한 절망감이 스쳤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황혼의 그림자를 몰고 온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 떨어뜨렸다.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나뭇잎을 보고 흠칫 놀란 그가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가벼워 보일까 봐 웃지도 않고 일에만 몰두했어요.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고요. 그리고 오늘… 다시 고백했어요. 이번엔 더 정성껏 준비해서, 회사 옥상으로 그녀를 불렀죠. 당신이 바라는 진중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제발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매달렸어요. 그런데 그녀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어요.”

제이미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간절한 구애가 또 다시 실패한 비참함이 느껴졌다.


“그녀는 말했어요. 제가 변하려고 노력한 걸 잘 안다고. 그건 정말 고맙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생기지 않는다고요… 날 동료로서 좋아하지만, 사랑하진 않는다고요.”

그는 발밑에 떨어진 나뭇잎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말을 마친 그녀가 등을 돌렸고, 난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더 괴로웠죠. 너무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난간에 기대려 손을 짚었는데… 온몸에 힘이 풀려 그만… 뛰어내리려던 건… 결코 아니었어요.”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카론이 물었다.

“… 아까 당신이 보고 있던 사람이 그녀죠?”

제이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깊은 후회와 체념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잠시 후, 제이미가 조금 후련해진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이제 가요.”

자리에서 일어난 카론이 제이미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으며, 제이미는 작게 웃었다.

제이미와 카론이 걸음을 옮기자, 바위 끝에 앉아 있던 쏠과 넬이 폴짝 뛰어내렸다.

“이 고양이들은 뭐죠? 반려묘인가요?”

제이미가 묻자, 넬이 기다렸다는 듯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도 소울 가이드예요!”

“고양이가 말을…?”

깜짝 놀란 제이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쏠이 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제발 쫌! … 사람 말 할 땐 야옹~ 먼저 하라니까!”

쏠까지 말을 하자 제이미가 한 번 더 놀랐다.

카론이 '씨익' 웃으며 설명했다.

“얘들도 저랑 같은 소울 가이드예요. 얘가 쏠이고, 쟤가 넬이죠. 우린 한 팀이에요”

제이미는 신기한 듯 허리를 굽혀 쏠과 넬을 만져보았다. 넬은 어깨를 으쓱했다. 넬의 털은 부드러웠고, 작은 몸은 따뜻했다. 제이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에 안도하는 듯했다.

제이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재미있는 고양이들이구나.”


넷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이미의 얼굴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늘이 조금씩 걷히고, 숲길을 걷는 그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쏠과 넬을 힐끗거리는 그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눈치 빠른 쏠이 말했다.

“웃으니까 훨씬 잘 생겨 보여요.”

넬이 말을 이었다.

“밝은 성격을 바꾸느라 많이 힘들었겠어요. 저도 몇 번 해 봤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정말 힘들었어! 사람이든 고양이든 저마다 타고나는 성격 같은 게 있나 봐.”

그의 목소리에는 그동안 일부러 억눌렀던 밝고 유쾌한 감정들이 묻어났고, 자신의 본성을 감추려 애썼던 지난날의 고통이 느껴졌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카론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사람의 성격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언젠가는 튀어나온대요.”

“우와! 역시 미스터 카론은 똑똑해요!” 쏠과 넬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기던 제이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형제가 없어서 그런지 혼자 있는 게 정말 싫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늘 밝고, 쾌활하게, 사람들 틈에 섞이려고 했던 거였는데….”

그의 목소리에 깊은 외로움이 묻어났다. 카론은 제이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릿했다.

자신 역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묘한 동질감이 카론의 가슴 깊은 곳을 ‘톡’ 건드렸다.

“제이미!” 카론이 부드럽게 불렀다.

제이미가 고개를 돌렸다.

“쉼터 말고… 우리 집으로 가지 않을래요? 오늘은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제이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그 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쏠이 넬에게 눈짓했고, 넬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미스터 카론! 저희가 아이리스한테 가서 허락받아 올게요!”

둘은 카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쏜살같이 달렸다. 카론은 녀석들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 녀석들이 또…” 카론은 이마를 짚으며 혀를 찼고, 제이미는 멍하니 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럭바위로 돌아와 앉은 둘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눴다.

카론은 제이미에게 아이리스가 사는 쉼터와 스틱스 강에 대해 얘기해 줬고, 제이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절망과 체념, 두려움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설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카론은… 징검다리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쏠과 넬이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왔다. 넬이 뺨에 묻은 나뭇잎을 떼며 소리쳤다.

룰 브레이커씨! 빨리 가요! 배고파 죽겠어요.”

넬의 갑작스런 호칭에 카론이 당황하자, 쏠이 앞발을 들어 넬의 입을 '톡' 쳤다.

“아이구! 저 놈의 주둥이, 말을 해도…”

쏠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미스터 카론! 아이리스는 단번에 허락했어요. 지난번에 집사와 고양이가 함께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해 주더니, 이번엔 영혼의 마지막 밤을 쉼터가 아닌 게이트하우스에서 보내게 한 건 정말 잘 한 결정이라고요. 카론을 '따뜻한 규칙 파괴자'라며 흐뭇해 하셨어요.

“내 말이 그 말이라고!” 넬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카론은 피식 헛웃음을 흘렸고, 제이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따라 웃었다.


넷은 숲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왔다. 뒷문이 열리자마자 따뜻한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카론은 제이미에게 따뜻한 커피를 타 주었다. 제이미는 잔을 들고 집안을 둘러보다 소파에 앉았다.

그사이 카론은 쏠과 넬의 텅 빈 사료 그릇에 바삭한 사료를 가득 채워 주었다. 녀석들은 허겁지겁 사료를 씹고 물을 할짝거렸다.

카론은 오래된 LP판 하나를 골라 턴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커피를 타서 제이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바늘이 LP판에 사뿐히 내려앉자, 쇼팽의 '녹턴 2번' 피아노 선율이 거실을 따뜻하게 채웠다.

때로는 가슴 저미도록 쓸쓸하고, 때로는 온몸을 감싸듯 포근한 선율이 제이미의 슬픈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식사를 마친 쏠과 넬도 소파에 앉아 함께 음악을 들었다.

장작불이 사그라드는 캠핑장의 밤처럼, 평화로운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게스트와 함께 게이트하우스의 밤은 깊어갔다. 카론은 제이미에게 방을 양보하고,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창밖으로 스며든 희미한 달빛이 카론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다음날 셋, 아니 넷은 느긋하고 평화로운 아침을 만끽했다.

제이미는 잠을 푹 잤는지 한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소파에 앉아 카론이 타 준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셋의 일상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성실한 집사 모드의 카론과, 사람 말 하는 고양이들의 끝없는 투닥거림은 즐겁고 유쾌했다.

카론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신중하게 LP판을 골랐다.

어떤 음악이 제이미의 마지막 여정에 어울릴지 신중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이윽고 턴테이블에 바늘이 내려앉자, 비틀즈의 『히어 컴스 더 선(Here Comes the Sun)』이 따뜻하게 울려 퍼졌다. 어둡고 긴 밤을 건너 온 햇살처럼 밝고 희망적인 멜로디는 어제의 슬픔을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했고, 어딘가 아련하게 스며드는 여운은 다가올 이별을 조용히 예감하는 듯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열 번 울자, 넷은 웃으며 집을 나섰다.

카론은 제이미에게 쉼터에 들러 아이리스에게 인사하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제이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스는 쉼터 마당에 앉아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드럽게 쏟아지는 햇살이 아이리스의 무지갯빛 머리카락 위로 금빛 가루처럼 흩어졌다.

제이미는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 인사를 했고, 아이리스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짧지만 따뜻한 작별이었다. 그들은 오솔길을 내려가 스틱스 강에 도착했다.


카론이 장대를 밀자 펀트는 금빛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제이미는 배 가운데 앉아 눈을 감고 흐르는 강물에 손을 넣어 차가운 물결을 느꼈다.

뱃머리 지정석에 앉아 있던 넬이 앞발을 뻗어 제이미를 따라하려다 그만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하마터면 강물에 빠질 뻔한 순간 쏠이 잽싸게 넬을 붙잡으며 탄식했다.

“아차! 그냥 빠지게 둘 걸.

곧장 자세를 고쳐 앉은 넬이 발톱을 세우고 도끼눈을 뜨자, 쏠은 폴짝 뛰어 제이미 뒤로 달아났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눈을 뜬 제이미도, 녀석들의 따로 행동 따로 장난질에 이골이 난 카론도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배가 강 건너편에 닿자, 카론은 제이미에게 악수를 청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이미가 카론을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웠어요.”

그는 쏠과 넬의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고 배에서 내렸고, 셋은 말 없이 그를 배웅했다.

잠시 후 제이미는 징검다리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징검돌을 건넜다. 징검다리 너머 천국의 계단이 햇빛에 반짝였고, 그는 황금빛 계단을 걸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의 모습이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카론은 장대를 들어 펀트를 돌렸다. 돌아오는 배는 물살을 타고 가볍게 미끄러졌다. 셋은 느릿하게 걸어 쉼터로 돌아왔다. 카페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종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다.


카페 안은 향긋한 허브 냄새로 가득했다. 아이리스가 그들을 반기며 테이블을 가리켰다.

카론의 자리엔 따뜻한 자스민차가, 쏠과 넬의 자리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참치죽이 놓여 있었다.

허겁지겁 그릇 바닥까지 깨끗하게 핥은 넬이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한 번 남았네요.”

쏠이 카론을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아이리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제오늘 수고 많았으니 내려가서 푹 쉬렴.”

카론과 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넬이 코맹맹이 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아이리스, 츄르 좀 주시면 안 돼요? 며칠 전에 주신 거 다 먹었단 말이에요… 히히.”

아이리스가 피식 웃으며 앞치마 주머니에서 소고기맛, 닭고기맛, 연어맛, 그리고 게맛 츄르를 꺼내 넬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외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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