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혼자가 아니다

by 부지깽이

풀잎이 뺨을 간지럽히고, 차가운 바람이 눈꺼풀을 스쳤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카론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풀숲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사고가 났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는 배낭을 멘 채 누워 있었다. 흙냄새와 풀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땅의 촉감이 생생했다.

“깼다, 깼어!”

“정신이 들어요?”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쏠과 넬이 활짝 웃으며 앉아 있었다.

멍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던 카론은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것이 실감났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사고 당시 기억 때문에 무겁고 찌뿌드드할 거라 생각한 몸은 도리어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리고 그의 옷은 핏자국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 순간 카론은 아이리스의 인자한 얼굴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서 가요! 미스터 카론.”

넬이 설레는 얼굴로 재촉했다. 카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 어딜 가자는 거야?”

쏠이 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쏘아붙였다.

“야! 제발 쫌...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말하지 말라니까!”

“쳇! 잔소리 좀 그만해.”

익숙한 투닥거림에 카론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도 같이 가도 된대요. 카론과 함께요.” 넬이 신나는 목소리로 말하자, 쏠이 혀를 쯧쯧 차며 설명했다.

“아이리스가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휴가를 줬어요. 세상에 나가 맘껏 놀다 오래요. 미스터 카론이랑 함께라면 안심된다고….” 쏠의 목소리도 평소보다 톤이 높아져 있었다.

녀석들의 신난 모습을 보다 장난기가 발동한 카론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누가 너희를 데려간대? 내가?… 왜~애?”

예상치 못한 대답에 넬은 눈물을 글썽거렸고, 쏠은 고개를 푹 숙였다.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녀석들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카론에 대한 서운함이 가득했다.

카론은 그런 녀석들을 보며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장난이야, 장난!”

카론의 폭소에 둘은 펄쩍 뛰며 환호성을 질렀다.

“하마터면 미스터 카론 얼굴 할퀼 뻔…”

넬이 잔뜩 세운 발톱을 서둘러 감추며 한마디 했고, 셋은 또 한 번 신나게 웃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카론이 작은 바위를 툭툭 차서 신발에 묻은 흙을 탁탁 털며 말했다.

넬이 기다렸다는 듯 앞발을 번쩍 들었다.

“이쪽이에요, 이쪽! 여기로 쭉 가면 카론이 가려던 마을이 나와요. 제가 히치하이킹 할까요? 히히”

넬의 어이없는 말에 카론이 기분좋게 웃으며 말했다.

“트럭이나 조심하자 얘들아! 하하하.”

셋은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윌로 릿지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셋은 마을에 도착해 표지판을 따라 캠핑장으로 올라갔다.

캠핑장은 평화로웠다. 멀찍이 떨어진 사이트마다 텐트가 쳐져 있었고, 벌써부터 여기저기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강아지들이 짖는 소리도 들렸다.


카론이 사무실로 가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아버지의 부고를 전하자, 주인 노부부는 “그랬구나, 그래서 몇 년 동안 못 왔구나”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창고에서 삽을 한 자루 꺼내 주었다. 카론은 삽을 들고 캠핑장 꼭대기로 향했다.

쏠과 넬도 뒤를 따랐다. 그곳엔 아버지의 노트 속에 적힌 우람한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카론이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하자 삽날이 흙에 박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삽질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의 유골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유골함 위로 떨어졌다.

쏠과 넬도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슬픔을 함께 나눴다.

카론은 아버지의 유골함을 엄마의 유골함 옆에 조심스럽게 묻고 긴 기도를 올렸다.

쏠과 넬도 앞발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따뜻한 햇살이 느티나무를 감쌌고, 바람 소리마저 숙연하게 들렸다.

캠핑장으로 내려온 카론은 사무실 전화를 빌려 보험회사에 고장 신고를 하고, 긴급출동 요청을 했다.

주인 할아버지가 자신의 차로 카론의 차가 있는 곳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자 쏠과 넬이 기쁜 표정으로 “야옹~” 하고 울었다.

“자주 올게요.” 배낭을 멘 카론은 주인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캠핑장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한결 가벼웠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 조수석에 앉은 카론의 시야에 제법 넓은 강이 들어왔다.

강 위에는 로잉 보트와 나룻배들이 떠 있었다. 햇살이 강물 위를 부드럽게 비췄고, 물살은 잔잔하게 흘렀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카론이 물었다. “저기는 뭐죠?”

캠핑장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

강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조정부가 있어. 학생들이 저기서 훈련을 하지. 일반인들은 나룻배를 타고 낚시를 하기도 하고…”

“아! 그렇군요. 다음에 한 번 가 봐야겠네요.”

카론의 말에 뒷좌석에서 “야옹~”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쏠과 넬이 앞발을 들어 하이 파이브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카론의 차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이미 견인차가 와 있었다.

카론은 캠핑장 할아버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쏠과 넬도 “야옹~ 냐옹~”하고 울었다. 마치 ‘조만간 또 봬요’ 하는 소리 같았다.

견인차는 도시 입구 차량 정비소까지 카론의 차를 끌어다 주고 사라졌다. 정비기사는 카론의 차를 보더니 금세 고장 부위를 알아내 부품을 교환해 줬다.

카론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덜컹거리던 고물차가 ‘쿠르르릉’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깨어났다.

“소울 픽업 같은 소리가 나네.” 조수석에 앉은 넬이 중얼거리자, 뒷좌석에 앉은 쏠이 앞발을 들며 소리쳤다.

“미스터 카론, 렛츠 고!” 셋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에는 새로운 시작을 향한 설렘이 가득했다. 카론은 기분 좋게 액셀을 밟았다.


카론은 우선 학교 앞 월세방에 들러 필요한 짐을 빼서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지내기에는 월세방이 너무 좁았다. 시골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동물보호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에밀리 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카론이예요.”

“카론이야? 정말 카론 맞아?”

에밀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재차 확인했다.

“휴가 쓴다고 한 다음날부터 연락이 안 돼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동안 어디 있었어? 어디 다친 거야??”

에밀리의 폭풍 질문에 카론은 미안한 마음이 커지면서도 그녀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기뻤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2주 정도 깨어나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자세한 건 모레 출근해서 말씀드릴게요.”

교통사고라는 말에 에밀리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다급해졌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길래? 지금 어딘데? 어느 병원이야?”

카론은 “지금은 괜찮다”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에밀리는 그제야 자신이 계속 질문만 했다는 걸 깨닫고 미안해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론! 교통사고는 후유증 관리가 중요하니 이번 주는 푹 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나와.”

카론은 에밀리 소장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넬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애인이에요?”

“애인은 무슨… 상사구만. 딱 보면 모르냐?” 쏠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카론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머리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집구경 하고 있어. 마트 가서 너희들 먹을 것 좀 사 갖고 올게.”

마트란 말에 쏠과 넬의 눈이 반짝였고, 넬이 재빨리 외쳤다.

“미스터 카론! 난 아이스 퓨레! 그거 꼭 사와요!”

그날 밤, 셋은 작은 파티를 열었다.

카론이 사 온 참치맛 아이스 퓨레를 핥으며 넬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터 카론 귀환 축하해요! 앞으로도 맛있는 간식 많이 사 줘요!”

“축하한다면서 선물은 못 줄망정 자기 먹고 싶은 것을 사 달라니… 너는 참 염치도 없다.”

쏠이 혀를 끌끌 차며 핀잔을 주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저는 닭가슴살 좋아해요. 몸짱 될 거예요.”

넬의 엉뚱한 욕심과 쏠의 시크한 주문에 카론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시골집 거실에 셋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다음날부터 카론은 시골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아버지의 방을 깨끗이 치웠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카론은 몇 번이나 울음을 삼켰다.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거실 한켠에 고양이 화장실과 사료 그릇도 새로 사다 놓았다.

인터넷으로 캣타워도 주문했다. 카론의 일상은 그렇게 다시 ‘성실한 집사 모드’로 돌아갔다.

쏠과 넬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마냥 신기한 듯했다. 아침이면 카론이 주는 사료를 배불리 먹고 집안 곳곳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늘어지게 낮잠을 잤고, 밤만 되면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새로운 세상을 탐험했다.

둘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고, 네 발에는 흙먼지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바쁘게 이틀을 보낸 금요일 저녁, 카론은 휴대폰을 들었다.

윌로 릿지 캠핑장에 전화해 다음날 사이트가 있는지 물었고, 예약을 마쳤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에밀리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에밀리가 전화를 받자, 카론은 긴장한 듯 말을 더듬었다.

“혹시… 내, 내일 시간 되세요? 저랑… 캐, 캠핑 가지 않을래요?”

카론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에밀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잠시 후 “응! 갈게!” 에밀리가 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음날 점심 무렵, 카론은 시동을 걸면 ‘쿠르르릉’ 소울 픽업 소리가 나는 자신의 고물차에 캠핑 장비들을 바리바리 실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고 안에 잠들어 있던 텐트, 침낭, 타프 등이 트렁크에 차곡차곡 실렸다.

쏠과 넬의 눈은 흥분과 설렘으로 반짝였다.


셋은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쇼핑카트에 앉은 쏠과 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녀석들은 진열대를 가득 채운 처음 보는 물건들에 “야옹~” “냐~아옹!” 환호성을 질러댔다.

녀석들은 사람들 앞에선 고양이 소리만 내기로 한 약속을 잘 지켰다.

카론은 녀석들을 보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이상한 트리오’에 눈길을 줬지만 셋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카론은 숯불에 구워 먹을 고기와 캔맥주를 넉넉하게 샀다. 그리고 두 가지를 더 사야 했다.

그것은 바로 닭꼬치와 마시멜로! 녀석들이 어젯밤부터 숯불에 꼭 구워 먹겠다고 노래를 불렀던 특별메뉴였다. 카론은 캠핑장 주인 부부에게 선물할 와인도 한 병 샀다.


셋은 마트에서 나와 약속장소에서 에밀리를 만났다.

에밀리는 평소와 달리 활동적이면서도 멋스러운 캠핑룩을 입고 있었다.

상의는 붉은 체크무늬 티셔츠에 카키색의 가벼운 방풍 아노락을 걸쳤고, 하의는 편안한 차콜 그레이 카고 팬츠를 입고 있었다. 브라운 컬러의 경쾌한 트레킹화를 신었고, 머리에는 챙이 넓은 베이지색 모자를 썼다. 무심하게 둘러멘 카키색 백팩이 그녀의 룩을 완성했다.

그녀의 멋진 외모보다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가 카론의 심장을 마구 두드렸다.

쏠과 넬은 에밀리를 보자 처음에는 살짝 경계하는 듯했다.

에밀리가 녀석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쏠은 코를 살짝 대고 그녀의 향수 냄새를 맡았고, 넬은 에밀리의 손에 자신의 앞발을 살짝 올렸다.

에밀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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