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굿바이! 카론

by 부지깽이

아이리스가 무지개 속으로 사라진 후 카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쏠과 넬도 정신을 차리고 서로를 꼭 붙잡았다. 카론이 장대를 강에 넣고 바닥을 힘껏 밀자 펀트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폭풍우가 물러간 강물은 평소와 달리 거칠게 흘렀다. 그들의 배는 거친 물살을 가르며 묵묵히 나아갔다.

강을 건너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펀트가 강 건너편에 닿자, 운전자가 카론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고마웠어… 그리고 정말, 미안해.”

남자는 배에서 내려 징검다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게 왜 미안하다고 한 거지?’ 카론이 의아해할 때였다.

남자의 발이 첫 번째 징검돌을 딛은 순간 “으아아악!” 귀를 찢는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그가 딛고 선 징검돌이 아래로 푹 꺼졌고, 그의 영혼은 개울물 아래 깊은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카론은 충격에 빠져 주저앉았다.

쏠이 재빠르게 달려가 그가 놓친 장대를 붙잡았고, 넬은 그의 옆에 앉아 떨리는 팔을 붙들고 말했다.

“괜찮아요? 미스터 카론?”

“아니… 안 괜찮아! 많이 두려워….”

카론은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할게.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던 거, 그건 반만 진짜야.” 쏠과 넬이 놀란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도 그 선택을 못 했던 건…”

카론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차올라 있었다.

“내가 저 사람처럼 어둠 속으로 떨어지게 될까 봐 겁이 나서였어.”

카론의 예상치 못한 고백에 주변의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은 듯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넬이 앞발로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절대로. 미스터 카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로드킬 당할 뻔한 우리를 구해줬잖아요. 그날 카론이 없었으면… 우리는 어쩌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장대를 붙잡고 있던 쏠도 입을 열었다.

“맞아요! 미스터 카론. 그리고, 방금 저 사람… 그날 카론을 치고 달아났던 운전자예요.”

“뭐, 뭐라고…? 말도 안돼!”


카론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치고 달아나 코마에 빠트린 남자가 방금 전 눈앞에서 사라진 그 사람이었다니….

“이 무슨 잔혹한 운명이란 말인가!” 중얼거리는 카론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물기 어린 눈으로 발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랬구나. 고마워. 얘들아.”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장대를 다시 붙잡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두려움 대신 무언가 단단한 결심이 깃들어 있었다.

“이제 돌아가자!”

펀트가 다시 미끄러지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펀트를 부드럽게 밀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셋의 마음속엔 이제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소울 가이드 카론의 ‘마지막 항해’가 끝났다.

그는 배에서 내려 펀트를 단단히 정박한 뒤, 배의 옆면에 새겨진 ‘Karon & Sol & Nell’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던 쏠과 넬도 감회에 젖었다.

스틱스 강은 유유히 흘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뺨을 스쳤다.

셋은 오솔길을 걸어 쉼터로 올라왔다. 카론이 카페 문을 열자, 나직하면서도 장엄한 음악 소리가 그들을 감쌌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이리스는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졸고 있는 듯했다.

셋은 살금살금 다가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이윽고 음악이 끝나자, 아이리스가 허리를 두드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이구 허리야. 오랜만에 몸을 썼더니…”

눈을 번쩍 뜬 그녀가 앞에 앉아 있는 카론과 쏠, 넬을 보고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셋은 아이리스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리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리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덥지? 고생했어. 여기 시원한 음료 마셔.”

테이블에는 찻잔 두 개와 작은 접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카론의 앞엔 정체불명의 아이스티가, 쏠과 넬 앞엔 연어맛 아이스 퓨레가, 그리고 아이리스 앞엔 따뜻한 생강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쏠과 넬은 처음 먹어보는 아이스 퓨레의 황홀한 맛에 푹 빠져 정신없이 핥아댔다.

아이스 퓨레를 다 먹은 넬이 아이리스를 힐끗 쳐다봤다. 녀석의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아이리스, 아까 너무했어요! 악마를 강으로 던지고 말 한마디 없이 혼자서만 무지개를 타고 쌩 사라지다니! 저희도 데려왔어야죠! 무지개 한 번 타보고 싶었단 말예욧!”

넬의 귀여운 투정에 아이리스는 어이없는 웃음만 흘렸다.

쏠이 넬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핀잔을 줬다.

“멍충아! 무지개를 타는 건 죽어서나 가능한데 우린 살아 있잖아.”

“그런가?” 넬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쏠을 쳐다보다가 아이리스를 향해 금세 표정을 바꾸고 애교 섞인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아이리스! 츄르 좀 주세용. 기왕이면 무지개맛으로요! 츄르 떨어지면 안 돼용!”

셋은 넬의 엉뚱한 요구에 웃음을 터뜨렸다.


쏠이 접시 바닥의 아이스 퓨레를 핥다가 불쑥 아이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리스! 아까 그 악마는 누구였어요?”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내가 지난번에 말한 바탈이란다. 스틱스 강 주변 짙은 어둠 속에 숨어 길잃은 영혼을 잡아먹던 놈이지. 지옥의 첫 군주 바알의 사생아라고 내가 말했었나? 그놈이 삼켰던 영혼을 뱉어내 만든 부하가 너희가 만났던 루어란다. 나약하거나 사악한 영혼들의 귓가에 달콤한 거짓말을 속삭이는 악마의 하수인들!”

쏠은 루어들을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 물었다.

“아이리스가 동굴에 가뒀다면서요. 어떻게 탈출한 거죠?”

“사악한 영혼이 악마의 이름을 부르면 봉인이 풀린단다. 아마 루어들이 트럭 운전자의 귀에 속삭였겠지.”

그 말에 셋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런데 악마도… 자식이 있어요?”

카론은 피식 웃으며 넬을 보았다. 제우스 신화가 떠오른 것이다.

“그럼! 있지. 신들의 왕 제우스만 해도 본처인 헤라 몰래 수많은 자식을 뒀다고… 하하.”

“미스터 카론은 역시 그리스신화 덕후라니까.” 쏠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 순간 넬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이리스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아이리스! 아이리스는 혹시 숨겨놓은 자식 없어요?”

“뭐라고? 이 녀석이!”

그녀는 어이없다 못해 약 올라 죽겠다는 표정으로 넬의 이마를 세게 ‘콩!’ 쥐어박았다.

넬과 아이리스의 유치한 티키타카를 구경하던 카론도 ‘기회는 이때다’ 싶어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이리스! 그런데 왜 할머니가 된 거예요? 무지개의 여신이라면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자라고 다들 생각하잖아요. 솔직히 저도 풀숲에서 처음 봤을 땐 믿기지 않았다구요.”

“카론, 너마저!” 아이리스는 그 유명한 시저의 ‘브루투스, 너마저!’를 떠올리는 뉘앙스로 비장하게 외치고 냉큼 덧붙였다.

“나도 몰라! 알아도 절대 말 안 해 줄 거야!”

셋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쏠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한 마디 툭 던졌다.

“늙어서 그렇지 뭐… 당연한 걸 뭐하러 묻냐?”

“뭐라고?!”

쏠의 ‘확인사살’에 아이리스는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카페 안은 또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넬이 히죽거리다가 한 마디 더했다.

“그런데 아이리스, 아까 듣던 그 촌스런 음악은 뭐예요? 빰빰~ 빠밤빰~~거려서 배고파졌잖아요.”

아이리스는 이젠 웃을 힘도 없는지 급격히 늙은 얼굴로 카론을 바라봤다. ‘제발 도와줘’ 하는 표정이었다.

카론이 넬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헨델의 ‘사라방드’(Sarabande)야. 느리고 장엄한 3박자의 춤곡인데, 비극적인 슬픔과 숭고한 평화가 동시에 담겨 있어 종교 음악으로도 많이 사용돼.”

“우와! 역시 카론은 척척박사야. 모르는 게 없어.”

쏠과 넬이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넬의 목소리에는 은근히 놀리는 뉘앙스가 섞여 있었고, 그걸 모를 리 없는 카론이 넬을 째려봤다.

그때였다. 카론의 눈앞에서 뭔가 번쩍하는가 싶더니, 넬의 이마에서 ‘꽁~’ 하는 소리가 났다.

넬은 “아야!” 하며 따끔거리는 이마를 문질렀고, “카페에 벌이 들어왔나?” 중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치 빠른 쏠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금 전, 아이리스의 소매 속에서 아주 작은 뿅망치가 번개처럼 튀어나와 넬의 이마를 '콩~' 때리고 다시 소매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봤기 때문이었다.

아이리스가 오른손 검지를 입술에 대며 쏠에게 윙크를 했고, 쏠은 입을 쏙 다물었다.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강차를 호호 불며 홀짝거렸다.


웃음소리가 사그라든 카페 안은 어느새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넬은 입이 근질거렸지만 카론의 눈치만 살폈고, 쏠은 아이리스의 입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잠시 후, 아이리스가 카론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자, 이제 선택할 시간이야 카론. 돌아갈래? 아니면 징검다리를 건널래?”

카론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말했다.

“돌아갈게요. 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이리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카론에게 앞에 놓인 차를 권했다.

카론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키자 따뜻하고 향긋한 향기가 그의 영혼을 휘감았다.

그의 눈 속에 하늘처럼 맑고 바다보다 깊은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다.

아이리스가 나지막이 말했다.

“굿바이! 카론….”


카론의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리더니, 어느 순간 의식이 툭 끊겼다.

그리고 깊은 어둠 속에서, 기억의 파편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오기 시작했다.

스틱스 강을 건너는 펀트, 징검다리에서 들려온 비명, 영혼들의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 트럭에 치여 붕 떠오르던 순간까지….

필름을 되감기하듯 기억들이 하나로 이어졌고, 어느 순간 눈앞이 흰 빛으로 뒤덮였다.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기억들은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그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는 저 멀리 희미한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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