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새벽 4시.
정규 씨는 평소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눈을 떴습니다.
밤새 잠을 설친 탓이었습니다.
꿈속에서도 그는 씩씩대고 있었습니다.
“망할 놈의 할망구! 죽을 날 받아놓은 마당에 첫사랑을 찾아달라니….”
잠꼬대까지 하다가 깬 정규 씨는, 찡그린 얼굴로 잠든 아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방바닥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정규 씨는 속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습관처럼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와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리어카를 끌었습니다.
잡념을 없애는 데는 땀을 흘리는 게 최고였습니다.
모두 잠든 시간에 달동네를 돌며 박스와 고철을 주워 리어카에 실었습니다.
하지만, 고물상에 부리고 손에 쥔 돈은 고작 4,400원.
새벽 찬바람을 뚫고 흘린 땀에 비하면 허무한 무게였습니다.
집 앞 담벼락에 리어카를 세워두고 대문을 열자, 깜숙이가 쪼르르 달려와 다리에 몸을 비볐습니다.
“야옹~”
평소라면 귀찮아하며 “저리 좀 가~” 하고 발로 밀었을 정규 씨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따라 왠지, 녀석이 안쓰러웠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우리 둘만 남겠구나….’
정규 씨는 깜숙이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 등을 쓰다듬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깜숙이는 낯선 품에서 빠져나오려 버둥거렸습니다.
정규 씨가 방문을 열었을 때 상순 씨는 깨어 있었습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걸 보니 통증이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습니다.
“언제 깼어? 많이 아파?”
“으응… 방금 전에요.”
상순 씨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정규 씨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빈속에 약을 먹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 어제 남은 미역국을 데우고 계란 프라이를 부치고, 고물상 주인이 준 김 봉지를 뜯고, 냉장고 깊숙이 들어 있던 묵은지를 꺼내 작게 썰어 접시에 담았습니다.
“배고프지? 어서 먹고 약 먹자.”
상순 씨는 남편이 차려준 진수성찬을 꾸역꾸역 넘기고, 한 주먹이나 되는 약을 꿀꺽 삼켰습니다.
잠시 후 달그락달그락 설거지를 끝낸 정규 씨가 엊저녁에 썼던 꽃무늬 찻잔에 커피를 타서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은 찻잔을 들고 뜬구름 잡는 얘기만 나눴습니다.
어젯밤 상순 씨가 말한 ‘첫사랑’ 얘기는 금기어라도 된 듯, 누구도 먼저 꺼내지 않았습니다.
부탁 하나 들어달라던 상순 씨도, 호기롭게 소원을 들어주겠다던 정규 씨도, 서로의 눈치만 살폈습니다.
“애들한테 알렸어. 어젯밤에 내려 온다는 걸 내가 말렸어. 오늘 온대.”
정규 씨의 말에 상순 씨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깜숙이가 상순 씨 옆에 와서 찹쌀떡처럼 몸을 밀착하고 엎드렸습니다.
상순 씨가 주름진 손으로 녀석의 턱을 긁어주자, 녀석은 “가르릉 가르릉” 골골송을 부르며 졸기 시작했습니다.
평화롭지만,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아침이었습니다.
거실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아홉 번 울었을 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엄마!!!”
명자가 차 문도 닫지 않고 달려와 평상에 나와 앉아 있는 엄마 품에 안겨 오열했습니다.
뒤이어 들어온 명수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털썩 주저앉아 엄마의 손을 꼭 쥐었습니다.
한바탕 눈물바다가 지나가고, 자식들의 성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엄마, 서울 큰 병원 가 보자. 응? 오진일 수도 있잖아.”
명자가 울먹이며 말하자, 명수도 거들었습니다.
“그래, 엄마. 요즘 의술이 얼마나 좋은데…. 항암 치료받으면 더 오래 살 수 있대. 제발 포기하지 말고 입원하자, 응?”
명자와 명수는 눈물을 훔치며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상순 씨는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내 병은 내가 잘 알아. 병원 가서 주렁주렁 호스 달고 누워있기 싫다. 억지로 숨만 쉬는 건 더 싫어. 마지막 가는 길은 내가 정하고 싶다. 난 그냥 이 집에서, 니들 아버지가 해주는 밥 먹다가 조용히 가고 싶어.”
ㅣ
“엄마… 제발!”
“아버지! 아버지도 말 좀 해 보세요. 네?”
남매는 엄마와 아버지에게 번갈아 매달렸습니다.
“휴일도 아닌데 어떻게 왔니? 회사는 어떡하고?"
상순 씨는 되려 자식들 걱정뿐이었습니다.
방에 들어와서도 한 시간쯤 실랑이를 벌이다, 약 기운이 돈 상순 씨가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마당으로 나온 정규 씨와 남매의 얼굴엔 먹구름이 잔뜩 끼었습니다.
”아버지, 엄마 그냥 두실 거예요?"
명자가 따지듯 묻자, 정규 씨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니들 엄마 바라는 대로 해주자. 간밤에 신신당부하더라. 억지로 숨만 붙여놓는 연명치료 같은 건, 절대로 하지 말라고.”
“… …”
정규씨의 탄식에 남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떨구었습니다.
정규 씨가 축 처진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습니다.
“명수야! 니가 어제 엄마 진료받은 병원에 가서 연명치료 거부 동의서 좀 받아와라.”
“저도 같이 가서 엄마 드실 것 좀 사 올게요.”
명수가 차 키를 챙겨 들자, 명자도 따라나섰습니다.
급하게 대문을 나서는 자식들의 등 뒤에 대고, 정규 씨가 망설이던 말을 툭 던졌습니다.
“그리고… 니네 엄마가 소원이 하나 있다더라.”
“소원이요? 뭔데요? 뭐든 다 들어드려야죠.”
명자가 차 문을 열다 말고 뒤를 돌아봤습니다.
정규 씨가 헛기침을 하며 쭈뼛거렸습니다.
“그게… 참… 내 입으로 말하기가 좀….”
“아, 뭔데요?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씀하세요.”
“그게, 그러니까… 니들 엄마가, 사람을 좀 찾아달란다. 그… 첫사랑이라나 뭐라나.”
순간, 명자와 명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습니다.
정적이 흐르는 세 사람의 머리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까악 까악-’ 하고 날아갔습니다.
“네? 처… 첫사랑이요? 엄마가요? 지금 이 상황에요?”
명자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습니다.
명수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아버지를 쳐다봤습니다.
정규 씨는 차마 자식들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애꿎은 담벼락만 발로 툭툭 찼습니다.
남매는 그런 아버지를 쳐다 보다가, 약속이나 한듯 깊은 한숨을 쉬고 차에 올랐습니다.
홀로 남은 정규 씨는 먼 산을 바라보며 담배만 만지작거렸습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 돌아온 남매의 손엔 짐이 한가득이었습니다.
명자는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팔을 걷어붙이고 전복죽과 소고기죽을 끓였고, 명수는 아버지 앞에 묵직한 박스를 ‘쿵’ 하고 내려놓았습니다.
시내 대형마트에서 사 온 녹즙 한 박스였습니다.
“아버지, 이거 유기농 녹즙이에요. 암 환자한테 좋대요. 식전 공복에 엄마랑 하나씩 드세요. 엄마 간병하시려면 아버지도 건강 챙기셔야 해요.”
명수가 정규씨의 손을 잡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엄마만 챙겨드리지 말고요. 주말에 애들 엄마랑 애들 데리고 내려올 때 더 좋은 걸로 사 올게요. 아끼지 말고 꼬박꼬박 드세요. 아셨죠?”
정규 씨는 평소라면 “돈 아깝게 뭐 이런 걸 사 오냐”고 타박했겠지만, 이번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스를 어루만졌습니다.
잠시 후,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았습니다.
상순 씨도 오랜만에 자식들과 함께해서인지 전복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웠습니다.
밥상을 물리고 꽃무늬 찻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이던 상순 씨가 자식들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이제 그만들 올라가 봐. 많이 바쁠 텐데….”
명자가 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습니다.
"엄마… 아까 아빠한테 들었는데… 사람 찾아달라고 했다면서?“
딸의 갑작스런 말에 상순 씨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습니다.
그녀는 도끼눈을 뜨고 정규 씨를 쏘아봤습니다.
"아니, 영감! 그 얘길 뭐하러 했어? 주책맞게!"
"아니… 그, 그게… 그러니까…"
정규 씨는 안절부절못하며 우물쭈물했습니다.
명자는 쩔쩔매는 아버지가 답답하고, 이 와중에 뜬금없이 첫사랑 타령을 하는 엄마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엄마! 미쳤어?“
명자의 입에서 날 선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뱉어놓고 아차 싶어 입을 가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지금 몸도 성치 않은데, 첫사랑이라니? 그것도 아빠한테 찾아달라니?"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습니다.
상순 씨가 고개를 떨구자, 명수가 누나의 옆구리를 쿡 찔렀습니다.
“누나! 말이 심하잖아.”
“아… 엄마, 미안. 내가 말이 헛나왔어. 정말 미안해….”
명자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엄마의 손을 잡았을 때였습니다.
“시끄럿! 내가 찾아줄 거야!”
갑작스러운 정규 씨의 고함이 거실을 울렸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습니다.
정규 씨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하나 못 들어줘? 그깟 첫사랑이 뭔 대수라고… 내가 찾아준다고! 내가!”
명자와 명수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평생 보수적이고 고지식했던 아버지가 맞나 싶었습니다.
정규 씨의 뜬금없는 큰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순 씨의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졌습니다.
거실 구석에 엎드려 있던 깜숙이가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가, 상순씨의 표정을 읽은 듯 요물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냐앙’하고 웃었습니다.
호기롭게 큰소리쳤지만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주름진 정규 씨의 얼굴 위로, 뜨거운 햇살이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