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뭐, 누구? 첫사랑???

by 부지깽이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

정규 씨는 주름진 뺨을 타고 흐르는 굵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고개를 차창 밖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상순 씨의 손을 잡은 그의 투박한 손에는 핏기가 가실 만큼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영감, 손 아파.


상순 씨의 힘없는 목소리에 그제야 정규 씨가 화들짝 놀라 손아귀 힘을 풀었습니다.

정규 씨의 무릎에는 하얀 약봉지가 가득 담긴 검은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당장 입원하라고 권했지만, 상순 씨는 완강했습니다.

“싫어요.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 거야.


작년 가을, 옆 동네 강 씨 할멈이 요양병원에서 쓸쓸하게 떠난 걸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복 같은 하얀 천장,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그 낯설고 차가운 곳에서 “집에 가고 싶다”고 울먹이던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습니다.

상순 씨는 죽더라도 내 집 아랫목에서, 손때 묻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고 싶었습니다.

정규 씨가 제발 의사 선생님 말 좀 듣자고 통사정해 봤지지만, 마른 하늘에 날벽락처럼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진통제만 한 보따리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정규 씨가 상순 씨를 부축해서 택시에서 내렸을 때 마당엔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습니다.

“야아옹~”

마루 밑에서 깜숙이가 튀어나왔습니다.

상순 씨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리를 굽혀 깜숙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습니다.

그리곤 바로 익숙한 손길로 깜숙이의 빈 밥그릇과 물그릇을 닦아 사료를 채워주었습니다.

“우리 애기 배고팠지? 많이 먹어라.”


깜숙이는 사료를 오독오독 씹으면서 자꾸만 정규 씨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평소라면 “으이구!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라며 혀를 찼을 할아버지가 넋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순 씨가 힘겨운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눕자, 정규 씨는 꺼져가는 연탄불을 갈고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한숨만 나왔습니다. 쉰 김치와 밑반찬 몇 개뿐….

평소엔 아무렇지 않던 텅 빈 냉장고가 오늘따라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할멈, 좀 쉬고 있어. 나 좀 나갔다 올게.”

정규 씨는 신발도 제대로 못 꿰신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습니다.


그는 동네 정육점으로 달려가 주저없이 소고기 한 근을 사고, 마트에서 미역과 계란 한 판도 샀습니다.

평생 십 원 한 장 허투루 안 쓰던 ‘자린고비’ 정규 씨가 처음으로 가격표도 안 보고 물건을 담았습니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상순 씨는 새우처럼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습니다.


정규 씨는 조용히 마당으로 나가 서울에 사는 딸 명자와 아들 명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놀라지 말고 들어라. 니네 엄마가… 간암이란다. 그것도 말기… 길어야 6개월이란다.”

수화기 너머로 자식들의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당장 내려오겠다는 걸 정규 씨가 뜯어말렸습니다.


“니들 엄마 이것저것 검사받느라 많이 지쳤어. 지금 자니까 내일 와, 내일….”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울음을 꾹꾹 누르며 전화를 끊은 정규 씨는 부엌으로 들어가 소매를 걷어붙였습니다.

국거리용 소고기를 참기름에 달달 볶고, 불린 미역을 넣어 푹 끓였습니다.

소금 대신 국간장으로 감칠맛을 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정규 씨는 젊은 날 월남전에서 돌아와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철물점, 만두가게, 친구네 고깃집 주방일까지….

코팅이 다 벗겨진 거뭇한 프라이팬을 닦아, 마블링이 하얗게 핀 꽃등심을 올렸습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고기가 야들야들하게 익어가자, 고소한 냄새를 맡은 깜숙이가 부엌 문지방 앞에서 눈을 깜빡였습니다.

“할멈, 일어나. 저녁 먹자.”

정규 씨가 밥상을 내려놓고 아내를 깨웠습니다.

부스스 눈을 뜬 상순 씨가 밥상을 보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미역국에, 1년에 한두 번 먹을까 말까 한 소고기 구이라니….


“어머, 오늘 누구 생일이야? 웬 소고기야?”

“생일은 무슨… 그냥 갑자기 고기가 땡기길래…. 어여 먹어 봐.”

정규 씨는 짐짓 퉁명스럽게 말하며, 아내의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억지로 쥐여주었습니다.

상순 씨는 남편의 마음을 알면서도 짓궂게 농을 던졌습니다.

“아이고!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천하의 짠돌이 박정규 씨께서 소고기를 다 사 오시고?”

“이 사람이 진짜! 먹기 싫으면 말어!”

정규 씨가 헛기침을 하며 째려보는 척했습니다.

상순 씨가 미역국을 한 술 떠먹더니 눈을 감았다 떴습니다.

“음… 간이 딱 맞네… 영감 솜씨 안 죽었구만.”


그때 밥상 옆에 앉아있던 깜숙이가 “냐앙~” 하고 울었습니다.

녀석은 상순씨의 팔에 머리를 쓱쓱 비벼대더니, 링거 바늘을 뺐던 자리에 퍼렇게 멍이 든 상순 씨의 손등을 핥았습니다.

마치 고기 한 점 주면 ‘호~’ 해주겠다는 듯이요.

“영감, 깜숙이도 좀 줘요. 우리만 입이야?”

“거참, 이 비싼 고기를…”

정규 씨는 투덜대면서도, 가위와 접시를 가져와 소고기를 작게 잘라 놓아주었습니다.

깜숙이가 ‘찹찹찹’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소고기를 씹어 삼키자, 그 모습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얼굴에 잠시나마 흐뭇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렇게, 정규 씨와 상순 씨의 슬프고도 따뜻한 밤이 깊어갔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상순 씨가 습관처럼 밥상을 치우려 하자 정규 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놔둬! 오늘부터 밥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거 싹 다 내가 할 거니까, 할멈은 손 하나 까딱하지 마!

정규 씨는 아내의 손에서 밥상을 홱 뺏어 들고 부엌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상순 씨가 헛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아이구! 50년을 부려 먹더니, 다 늙어서 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주겠다는겨?”

“시끄러! 어서 약이나 챙겨 먹어.”

정규 씨가 쑥스러운 듯 고무장갑을 낀 손을 휘휘 저었습니다.

상순 씨는 피식 웃으며 따뜻한 보리차와 약봉지를 챙겨 왔습니다.

한 봉지에 알약만 무려 다섯 개.

상순 씨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약을 털어 넣었습니다.


어느새 방바닥이 뜨끈뜨끈했습니다.

정규 씨가 평소와 달리 연탄구멍을 다 열어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감, 나 커피 한 잔만 타줘.”

“커피? 몸에 안 좋을 텐데….”

“안 좋아도 먹고 싶어. 이제 먹고 싶은 거 실컷 먹을 거야.

그 말에 정규 씨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그래… 먹자. 나도 한 잔 하지 뭐.”


정규 씨가 찬장에서 물때 낀 누런 플라스틱 컵 두 개를 꺼내 믹스커피 봉지를 뜯으려 했습니다.

“영감, 그거 말고… 우리 찻잔에다 마셔요.”

“응? 찻잔? 우리 집에 찻잔이 어딨어?”

정규 씨가 믹스커피를 든 채 두리번거리자, 상순 씨가 찬장 위쪽을 가리켰습니다.


“저기 찬장 깊숙한 데 찾아봐요. 예전에 명수 처가 인사 올 때 사 온 거 있잖아. 예쁜 꽃무늬 그려진 거.”

“아, 며늘애가 사왔던 거?”

정규 씨가 까치발을 하고 찬장 안쪽을 더듬자, 구석에 박혀 있던 먼지 쌓인 상자 하나가 손에 잡혔습니다.


상자를 열자, 신문지에 꽁꽁 싸인 화사한 꽃무늬 찻잔 세트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십몇 년 동안 빛 한 번 못 보고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찻잔이, 형광등 불빛 아래서 반짝하고 빛났습니다.

향긋한 커피 향이 방 안에 퍼졌습니다.

두 사람은 찻잔을 호호 불며 마주 앉았습니다.

아무리 밝은 목소리를 내려 해도, 말끝마다 물기가 배어 나왔습니다.

커피 잔이 비어갈 무렵, 상순 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영감… 나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뭔데? 말만 해. 내가 할멈 소원 다 들어줄게.”

정규 씨가 호기롭게 대답했습니다.

상순 씨가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부탁인데 소원 들어준다니 기분 좋네… 그런데 당신… 듣고 화낼 수도 있는데.”

“내가? 지금 이 마당에 무슨 화를 내? 다 들어준다니까.”

상순 씨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이윽고 그녀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럼… 나, 사람 좀 찾아줘.

“사람? 누구? 친구?”

“아니… 그게 아니고…”

상순 씨는 빈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이다가, 덤덤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습니다.

“내… 첫사랑.”


순간, 찻잔을 내려놓으려던 정규 씨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습니다.

뭐? 누구?… 첫사랑???

정규 씨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눈을 껌뻑거렸습니다.

손에 들린 찻잔이 덜덜 떨리며 받침 접시와 부딪쳐 ‘달그락달그락’ 요란한 소리를 냈습니다.


“할멈, 방금 뭐라 그랬어? 내가 귀가 먹어서 잘못 들었나 본데… 첫… 뭐?”

정규 씨는 자신의 귀에 꽂힌 보청기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습니다.

기계가 고장 나지 않고서야,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내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흐르던 애틋하고 짠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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