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평생 처음 뱉어본 말

by 부지깽이

우진 씨가 잡아준 호텔 방은, 평생 호텔 한번 못 가 본 노부부에겐 궁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폭신한 침대, 창밖으로 보이는 밤바다, 은은한 조명….

상순 씨는 침대 끝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아 주름진 손으로 침대 시트를 쓰다듬었습니다.


“영감,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네.”

“거참, 촌스럽게… 편하게 좀 누워봐.”

정규 씨는 짐짓 큰소리쳤지만, 사실 그 역시 엉덩이가 푹 꺼지는 푹신한 소파가 어색했습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마시다가, 문득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습니다.


“근데, 할멈!”

“왜요?”

왜 거짓말했어? 왜 ‘첫사랑’이라고 뻥을 친겨? 사람 간 떨어지게….

정규 씨의 불퉁한 물음에 상순 씨가 “호호호”입을 가리고 웃었습니다.


“그거야… 그냥, 장난 한번 쳐 봤지.”

“장난?”

“그래요, 장난! 평생 살면서 영감이 내 속 썩인 게 얼만데. 툭하면 소리 지르고, 고집 피우고… 얄미워서 골탕 좀 먹어보라고 그랬지.

상순 씨의 주름진 눈가에 웃음이 자글자글 맺혔습니다.


정규 씨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습니다.

“허, 참나. 그래서? 속이 좀 시원해?”

“응, 통쾌했어. 영감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는 걸 보니… 호호호.”

상순 씨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다가, 이내 그윽한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좋았어. 설렜고…”

“뭐가?”

그 나이 먹고 질투해 주는 게… 귀엽기도 하고, 이 양반이 아직 나를 여자로 봐주는구나 싶어서 고맙기도 하고.


그 말에 정규 씨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그는 쑥스러움을 감추려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습니다.

“으이구,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아주 불여우야, 불여우.”

“왜… 그래서 내가 미워요?”

상순 씨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정규 씨의 표정이 금세 진지해졌습니다.


그는 물끄러미 아내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다가 힘겹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럴 리가. 밉긴 왜 미워…”

정규 씨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습니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하기만 한걸.


그날 밤, 두 사람은 구름처럼 폭신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눈을 감았습니다.

희미한 불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췄습니다.

정규 씨가 어색한지 돌아누우려 할 때, 상순 씨의 거친 손이 불쑥 정규 씨의 손을 잡았습니다.


“영감, 자요?”

“아니… 왜, 안 자고?”

“나… 시집 잘 왔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하고 있네. 평생 고생만 바가지로 시킨 놈한테.”

정규 씨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아니야. 나 당신 만나서, 토끼 같은 새끼들 낳고, 지지고 볶고 살면서도 당신이 내 남편이어서 늘 든든했어. 오늘 봐 봐. 내 소원이라니까 자존심 다 버리고 그 먼 길 운전해서 데려다 줬잖아… 세상에 이런 남편이 어딨어?

상순 씨가 꼭 잡은 정규 씨의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고마워요, 영감. 나랑 살아줘서. 내 남편 해 줘서….”


어둠 속에서 정규 씨는 입술을 꽉 깨물었습니다.

눈물이 귓바퀴를 타고 베개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훌쩍임을 들키지 않으려 일부러 코를 ‘킁’ 들이마셨습니다.

“싱겁기는… 얼른 자. 내일 갈 길이 멀어.”

그날 밤,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점심 때가 돼서야 강릉을 출발한 고물 아반떼는 다시 거북이처럼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어제 강릉으로 올라갈 때의 무거운 분위기 대신, 차 안에는 밝고 유쾌한 트로트 음악이 흘렀습니다.

고물상 함 사장이 녹음해 둔 카세트테이프는 둘에게도 딱 맞았습니다.

휴게소에 들러 함 사장에게 줄 호두과자를 사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아반떼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익숙한 동네 어귀에 들어섰습니다.

좁은 골목길,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들. 호텔의 화려함과는 비교도 안 되는 누추한 곳이지만, 두 사람의 얼굴엔 비로소 안도감이 번졌습니다.


고물상에 차를 돌려주고 집으로 걸어 올라가는 길.

대문이 보이자마자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야아아옹-!!”

검은 그림자가 대문 틈을 비집고 튀어나왔습니다.

깜숙이는 많이 외로웠는지, 상순 씨 다리에 매달려 서럽게 울어댔습니다.


“아이구, 내 새끼! 할미 보고 싶었어? 배고팠지?”

상순 씨가 힘겹게 허리를 굽혀 깜숙이를 안아 들었습니다.

정규 씨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대문을 열었습니다.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은 두 사람은 마당 평상에 나란히 걸터앉았습니다.

긴 여행의 긴장이 풀리는지 나른함이 몰려왔습니다.


어느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어제 바다에서 봤던 것과는 또 다른, 따뜻하고 익숙한 노을이었습니다.

정규 씨가 말없이 상순 씨의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상순 씨는 남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습니다.

깜숙이도 그녀의 무릎에 앉아 골골송을 불렀습니다.


“영감!”

“왜?”

“노을이 참 이쁘네요.”

“그러게… 참 좋구먼.”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빨랫줄을 흔들었습니다.

상순 씨의 숨소리는 얕고 거칠었지만, 표정은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다정한 남편의 온기와, 무릎 위 고양이의 체온이면 충분하다는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정규 씨는 아내의 마른 손등을 자신의 거친 손으로 덮었습니다.


이제 곧 다가올 이별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할멈, 아니… 상순씨!”

“응? 왜요?”

“사랑혀….”

평생 처음 뱉어본 말이었습니다.


상순 씨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남편을 보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습니다.

“나두 사랑해요. 정규 씨.”

두 사람의 그림자가 마당 위로 길게 늘어지더니 하나로 포개졌습니다.

발갛게 물든 석양이 지금 이 순간을 영원처럼 물들였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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