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이 안내를 멈춘 곳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였습니다.
그 곳엔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서 있는 하얀 건물이 있었습니다.
간판에는 커다란 쉼표 안에 한자로 ‘休’, 그리고 그 아래 영어로 ‘Haven’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습니다.
차에서 내린 상순 씨는 막상 도착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주춤거렸습니다.
“뭐 해? 여기까지 와서…”
정규 씨가 퉁명스럽게 아내의 등을 떠밀며 앞장서서 카페 문을 열었습니다.
딸랑-
맑은 풍경 소리와 함께, 털이 복슬복슬한 고양이 두 마리가 튀어나왔습니다.
귀가 접힌 스코티시 폴드와 갈기가 풍성한 노르웨이숲 고양이였습니다.
녀석들은 낯선 손님에게 경계심도 없이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볐습니다.
정규 씨와 상순 씨는 집에 두고 온 깜숙이 생각에 표정이 편해졌습니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 안쪽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백발을 뒤로 정갈하게 빗어넘기고, 린넨 앞치마를 두른 남자였습니다.
정규 씨는 순간적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멋과 여유가 흐르는, 정규 씨와는 정반대 느낌의 남자.
‘저 친구인가? 제기랄, 늙어서도 폼나네.’
마음 속에 왠지 모를 패배감이 스쳤습니다.
정규 씨와 상순 씨는 창가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습니다.
정규 씨는 커피, 상순 씨는 유자차.
남자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드립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향긋한 원두 향이 카페 안에 퍼졌습니다.
상순 씨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그리고 아련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정규 씨는 그런 아내의 시선이 못마땅해 입을 삐죽이며 헛기침을 해댔습니다.
“주문하신 커피와 차 나왔습니다.”
남자가 쟁반을 내려놓고 돌아서려 할 때였습니다.
상순 씨가 입술만 달싹일 뿐 말이 없자, 답답해진 정규 씨가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저기, 혹시… 사장님 성함이 양우진 씨유?”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멈춰 섰습니다.
“네, 제가 양우진입니다만… 저를 아십니까?”
“나는 모르고, 이 사람이 알지. 아! 내 마누란데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수. 죽기 전에 첫사랑 얼굴 한번 보고 싶다길래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수다.”
정규 씨의 직구에 우진 씨의 눈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상순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상순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오빠! 저 모르시겠어요? 50년 전 서울 가리봉동 사실 때… 파출부 했던 상순이에요. 이상순!”
우진 씨의 눈동자가 흔들렸습니다.
잠시 기억을 더듬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에 반가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번졌습니다.
“아! 상순이? 너, 상순이 맞구나! 아이고, 이게 얼마 만이야. 세상에 어쩌다….”
그가 상순 씨의 앙상한 손을 잡으려다 멈칫했습니다.
옆에 앉은 정규 씨의 눈초리가 매서웠기 때문입니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자 정규 씨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는 담배나 한 대 피고 올 테니, 둘이 회포나 푸시오.”
자리를 비켜주려는 그의 팔을 상순 씨가 다급하게 잡아당겼습니다.
“영감, 어디 가? 앉아. 당신도 들어야 해.”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야, 첫사랑… 그런 거 아니야.”
정규 씨가 다시 자리에 앉자 상순 씨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습니다.
“50년 전, 봉제공장 다니시던 엄마가 갑자기 맹장이 터져서 급히 수술해야 했는데 집에 돈은 없고… 내가 부엌에서 울고 있었어. 그때 대학생이던 우진 오빠가 거금 3만 원을 선뜻 내줬어.“
정규 씨의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 시절 3만원이면, 파출부는 몇 년을 벌어도 손에 쥐기 힘든 큰돈이었습니다.
"사모님한테 사정을 설명하고 돈 좀 가불해 달라고 사정했는데, 오빠 어머님이 너를 어떻게 믿냐며 거절하셨지. 근데 오빠가 사모님 몰래 사장님에게 차용증까지 쓰고 돈을 빌려서 내게 줬잖아.”
상순 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돈으로 엄마 수술 잘 받고 며칠 병간호하고 돌아갔는데 오빠는 없었어. 야학에서 공장 다니는 언니오빠들 가르치다가 잡혀갔다고…. 사모님이 '이게 다 재수 없는 너 때문'이라고 내 머리채 잡고 쫓아내셨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오빠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입에 풀칠하고 사느라 빌려준 돈도 못 갚고….”
상순 씨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습니다.
“평생 빚진 마음으로 살았어. 오빠는 내 목숨보다 귀한 우리 엄마 살려준 은인인데… 죽기 전에 그 빚은 꼭 갚고 가고 싶었어. 그래서 이이에게 부탁한 거야.”
상순 씨의 목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정규 씨는 멍해졌습니다.
첫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아내에게 양우진은 뼈에 사무친 고마운 은인이자, 평생 갚지 못한 마음의 빚이었습니다.
‘뭐야, 첫사랑이 아니었어? 휴… 다행이다!’
정규 씨는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습니다.
상순 씨가 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우진 씨에게 내밀었습니다.
봉투 속엔 빳빳한 만 원짜리 열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오빠! 이거 받아줘. 그때 빌린 돈에 비하면 턱도 없지만… 내 마음이야. 제발 받아줘.”
우진 씨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이러지 마라, 상순아. 그깟 돈이 뭐가 중요해. 네가 이렇게 찾아와 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데….”
“잔말 말고 받으쇼!”
가만히 있던 정규 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진 씨가 깜짝 놀라 정규 씨를 쳐다봤습니다.
“이 사람이 평생 가슴에 돌덩이처럼 얹고 산 빚이라잖소. 당신이 안 받으면, 이 사람 편히 눈 못 감아. 그러니 얼른 받으쇼! 내가 생떼 부리기 전에!”
정규 씨의 막무가내에 우진 씨는 결국 마지못해 하며 봉투를 받았습니다.
“알겠습니다. 받겠습니다… 고맙다, 상순아. 정말 고맙다.”
오해가 풀리자 분위기는 급물살을 탔습니다.
우진 씨는 “먼 길 오셨는데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주방으로 들어가 정갈한 밥상을 차려 내왔습니다.
갓 지은 흰 쌀밥에 맑은 조개탕, 정갈한 반찬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습니다.
상순 씨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눈시울만 붉혔습니다.
평생 마음의 빚을 진 은인이 직접 차려준 밥상 앞에서 쉽사리 숟가락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정규 씨가 아내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며 말했습니다.
“은인이 차려준 밥인데 남기지 말고 다 먹어. 그래야 약 먹고 바닷바람 쐬러 가지.”
식사가 끝난 후 상순 씨는 약을 챙겨 먹었습니다.
우진 씨는 다시 한 번 향긋한 차를 내왔습니다.
세 사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알고 보니 정규 씨와 우진 씨는 동갑내기였습니다.
“허허, 그럼 친구네? 말 놓자고!”
정규 씨의 너스레에 우진 씨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상순 씨는 두 남자가 웃는 모습을 꿈만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꿈만 같은 시간이 흐르고….
“뻐꾹, 뻐꾹… 뻐꾹, 뻐꾹.”
벽에 걸린 뻐꾸기 시계가 네 번 울었습니다.
헤어질 시간이었습니다.
정규 씨와 상순 씨는 우진 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카페를 나왔습니다.
둘은 손을 꼭 잡고 바닷가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얼마쯤 걸었을까.
붉게 타들어가는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정규 씨가 묻자, 상순 씨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 돼요, 영감! 밤눈도 어두운 양반이 그 먼 길을 다시 운전하다간 큰일 나요. 우리, 어디 가서 하룻밤 자고 내일 내려가요.”
“그럴까? 근처에 모텔이 있으려나?”
그때, 정규 씨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낯선 번호였습니다.
“여보세요?”
“박 선생님, 저 양우진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진 씨는 차마 말을 못 놓고 깍듯한 존대말을 썼습니다.
“요 근처에 제 친구가 하는 호텔이 하나 있습니다. 방금 제가 제일 좋은 방으로 예약해 뒀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푹 쉬다 가세요.”
“아니, 이 양반이! 밥도 얻어먹었는데 무슨 호텔까지!”
“상순이가 준 봉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제게 주신 뜻밖의 선물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시고, 제발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정규 씨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는 말없이 휴대폰을 상순 씨에게 건넸습니다.
“오빠….”
“상순아. 부디 잘 견뎌라. 그리고 오늘… 찾아와줘서 정말 고마웠다.”
“저도 고마웠어요. 오빠! 부디 잘 지내세요.”
전화를 끊은 상순 씨의 뺨 위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노을이 지는 바다를 보며 정규 씨는 가만히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모래밭에 길게 드리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