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할멈, 어여 타!

by 부지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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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밥상머리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습니다.

정규 씨는 밥을 떠서 입에 넣었지만, 밥알이 모래알처럼 서걱거려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상순 씨도 덩달아 숟가락질이 느려졌습니다.


정규 씨는 상순씨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할멈! 그 사람 찾았어. 강릉에 산대. 내일 가 보자.”

무심한 척 툭 내뱉었지만, 말끝이 떨렸습니다.


그 소리에 상순 씨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스무 살 소녀처럼 반짝였고, 주름진 뺨에는 옅은 홍조가 피어올랐습니다.

정규 씨는 해맑게 웃는 아내의 얼굴이 얄미운 건지, 이별이 다가오는 것이 가슴 아픈 건지… “크흠, 큼!” 헛기침만 해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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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집안은 묘한 긴장감으로 부산스러웠습니다.

정규 씨는 장롱 깊숙한 곳에서 작은 나무상자를 꺼냈습니다.

상자 위에 앉은 먼지를 손으로 슥 털어낸 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습니다.

손끝에 딱딱한 플라스틱이 걸렸습니다.


“찾았다!”

정규 씨의 외침에 상순 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응, 운전면허증… 반납 안 하길 잘했네.”

정규 씨는 면허증에 박힌, 지금보다 훨씬 젊은 자신의 증명사진을 쓸쓸하게 문질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년 봄에 날 풀리면 할멈이랑 바닷바람이라도 쐬고 와서 반납하려고 했거든. 근데 이렇게 할멈 첫사랑 찾는 일에 쓸 줄이야….”

정규 씨가 쓴웃음을 짓자, 상순 씨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면허증이 ‘함께 맞이할 봄’에 대한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상순 씨는 알았습니다. 그 꿈이 이제는,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차는요? 우리 차 없잖아요.”

“고물상 함 사장 고물 아반떼 하루 빌리기로 했어.”

“아이고, 참 고마운 양반이네.”

“그렇지. 우리 밥벌이도 시켜주고 차까지 빌려 주니… 할멈은 준비 다 했어?”

“보채지 좀 마요. 꽃단장하고 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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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순 씨는 장롱을 열고 서울 자식들 집에 갈 때나 입던 우아한 자색 투피스를 꺼냈습니다.

정규 씨는 문지방 앞에 서서 화장대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루주를 바르는 아내의 굽은 등을 지켜보았습니다.

시샘이라기엔 너무 슬프고, 그저 애처롭기만 한 눈빛이었습니다.

“에잉! 칠할 데가 어디 있다고.”

괜한 심통을 부리며 그는 돌아섰습니다.

“나는 차나 빌려올게!”

방문이 탁 닫히는 소리에 상순 씨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피식 웃었습니다.

그 미묘한 웃음을 깜숙이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낡은 아반떼가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문 앞에 멈췄습니다.

정규 씨는 조심스럽게 시동을 끄고 핸드 브레이크를 당기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마당으로 들어오던 정규 씨가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상순 씨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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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늘어진 몸빼바지에 낡은 잠바떼기만 걸치던 상순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고운 자색 투피스 차림에 곱게 화장한 얼굴이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났습니다.

정규 씨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허, 할멈! 정말 곱구만! 새색시 같으네!”

평소 같으면 낯간지러워 절대 안 했을 칭찬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습니다.

“곱기는… 폭삭 늙은 호박에 줄 몇 개 그은 건데…”

상순 씨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마루 밑 사료 그릇에 사료를 수북이 부었습니다. 물그릇도 찰랑거리게 채워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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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숙아, 우리 다녀올게. 집 잘 보고 있거라.”

깜숙이는 “야옹~ 야옹” 울며 앞발로 마루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걱정 말고 잘 다녀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약은 챙겼지?”

상순 씨가 작은 여행가방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 그럼 가 볼까? 그놈의 고약한 소원 풀어주러?

정규 씨가 핸들을 잡으며 너스레를 떨자, 상순 씨가 작게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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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를 통과할 무렵, 상순 씨가 다급하게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영감, 저기 농협 앞에서 좀 세워줘요. 돈 좀 찾아가게.”

"돈? 돈은 뭐하러? 통장은 있고?"

정규 씨가 의아해하며 되물었습니다.

상순 씨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영감 몰래 딴 주머니 찼지."

"뭐? 딴 주머니?"

정규 씨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상순 씨가 가방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내며 말을 이었습니다.

“사실은 작년에 애들이 내 앞으로 통장을 하나 만들어 줬어. 한 달에 3만 원씩 넣어줬고.”

“그래? 녀석들도 참…”

물기에 젖은 정규 씨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그런데 돈은 뭐하게? 기름값, 밥값이고 내가 다 챙겼는걸.”

“그래도….”

상순 씨가 말끝을 흐렸습니다.

정규 씨는 더 묻지 않고 갓길에 차를 댔습니다.

농협 문을 열고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젖은 눈을 훔쳤습니다.

십여 분 뒤, 상순 씨가 품속에 봉투 하나를 소중히 넣고 나왔습니다.


고속도로에 오르자 낡은 아반떼가 힘겨운 소리를 냈습니다.

정규 씨는 혹여나 차가 퍼질까, 혹은 상순 씨가 힘들어 할까 봐 핸들을 쥔 손에 땀이 찼습니다.

하지만 상순 씨는 달랐습니다.

첫사랑을 만나는 설렘 때문인지, 오랜만의 여행 때문인지 소녀처럼 신나 보였습니다.

다행히 오늘 따라 통증도 별로 없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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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쉬었다 가요. 저기 휴게소 보이네.”

상순씨의 성화에 아반떼는 참새가 방앗간을 들르듯 휴게소를 들락거렸습니다.

그리고 상순 씨는 그때마다 군밤이며 호두과자, 박카스를 사 들고 왔습니다.

“자! 아~ 해봐요.”

상순 씨는 정규 씨 입에 주전부리를 넣어주며 호호 웃었습니다.

즐겁게 씹고 마시는 남편을 보는 상순 씨의 눈에 물기가 어린 것 같았습니다.


“할멈, 나한테 미안해서 이러는 거지? 딴 남자 보러 가는 게 찔려서?”

정규 씨가 심통이 난 척 툴툴대자, 상순 씨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옅게 웃었습니다.

“글쎄요... 그냥 맛있는 거 먹이고 싶어서 그러지.”

집에서 나선 지 네 시간 만에 ‘강릉’ 이정표가 보였습니다.

강릉 나들목을 나와 내비게이션을 보니 ‘목적지까지 30분’이라는 글자가 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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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씨가 옆을 슬쩍 보니, 상순 씨는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칠십을 앞둔 할머니가 아니라,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수줍은 소녀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정규 씨의 속에서 꾹꾹 눌렀던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울화가 아니라 서러움이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자신의 곁을 떠날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앞두고 저리도 설레하는 게 정규 씨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하지만 정규 씨는 그 감정을 다시 한 번 꾹꾹 눌러 가라앉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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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왔구먼… 첫사랑 만날 마음의 준비는 된겨?”

질투 섞인 빈정거림에 상순 씨가 정규 씨를 흘겨보았습니다.

얄밉지만 싫지 않은 눈흘김이었습니다.

정규 씨는 씁쓸하게 웃으며 엑셀을 밟았습니다.

잠시 후, 질투에 눈이 멀어 툴툴대는 할배와 꽃보다 고운 할멈을 태운 고물 아반떼가 도착한 곳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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