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 여자를 보셨을까요?”
생장 피에르 데 포트(Saint Jean Pied de Port) 순례자 사무소에서 나는 직원에게 휴대폰에 있는 사진을 내밀었다. 오십 대로 보이는 여자 직원이 내 사진을 유심히 지켜보는 동안 나는 너무 다짜고짜 사진을 들이대지 않았는지, 이것이 유럽에서는 무례한 행동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유감이지만, 요즘엔 꽤 많은 한국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때문에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크레덴시알이라는 순례자여권을 발급받고 나서 가방에 달 만한 조가비 하나도 구입했다. 그 사이 여자 직원은 내 휴대폰을 들고 가서 직원들과 불어로 대화를 나눴다. 사진을 본 다른 직원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별 것 아닌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도움을 받고 있다는 느낌에 힘이 났다.
“부엔까미노!”
절차가 다 끝난 여자 직원이 환히 웃으며 나에게 인사했다. 오브리가도! 라고 대답하려다가 순간 이곳이 프랑스임을 깨닫고는 땡큐! 로 응답했다. 나는 스페인어도 마찬가지지만 불어 또한 전혀 소통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유럽의 서비스직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지 전혀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배낭을 메고 순례자 사무소를 나왔다.
마음이 설레는 4월의 봄날, 생장의 하늘은 마치 가을과도 같이 청명하고 맑았다. 파란색이 짙은 봄 하늘을 가르며 비행기가 긴 꼬리를 달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어느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쾌속정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머릿속을 비워보려 노력했다. 저 하늘이 하늘인지 바다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려나 다시 그녀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주근깨가 매력적인 여자(나는 진심이었지만 그녀는 내가 언제나 놀린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름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운 여자, 별, 먼저 떠난 순례길 위에서 당신도 이 하늘을 보고 있나요?
B.M(그 여자의 이름을 물을 일이 없어서 앞으로도 모르겠지만, 대략 빅 맘?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이 말했던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강했다. 그녀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을 언제나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녀라면 반드시 이 길을 걸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를 만나야한다는 나의 의욕이 몸을 더 긴장하게 해주었다. 당장이라도 피레네 산 방향으로 전력질주를 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넘치는 의욕 때문에 나는 아까부터 생장의 작은 골목 경사로 벽에 기대어 머릿속을 비워보려는 시도를 몇 번이나 했던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니 배가 고파져서 의욕은 금방 잠잠해졌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기위해 유럽의 작은 마을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거리를 지나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변으로 나왔다. 부지런한 순례자들이 이미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한국 사람들로 보이는 일행도 있었다. 나는 적당한 레스토랑을 찾아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옆 테이블엔 노인 부부가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불어는 몰랐고 영어로 되어 있는 메뉴판에 적당히 (이름이)맛있어보이는 파스타를 주문하고 먼저 나온 빵을 대충 뜯으며 몸을 의자에 기대었다. 앞으로 800Km가 되는 이 길을 걸어가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그 마음이 단단해지는지 조차 몰랐다. 따뜻한 파스타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남은소스에 빵을 찍어 야무지게 먹었다. 옆에 있던 노인이 내가 먹는 것을 보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J.P라고 하네만, 합석해도 되겠는가?" 어느새 노부부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