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전 어떤 여자를 찾으러 여기에 왔어요…….”
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노인 부부에게 나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타지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겐 나의 치부가 드러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아주 편하게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음이 반가웠다. J.P는 미국에서 온 70살의 백발 남자이고, 마릴은 60대의 독일 여자였다. J.P는 옆 테이블에서 나를 가만히 보다가 대뜸 합석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동방예의지국 출신의 나는 벌떡 일어나 의자를 세 명이 앉기 좋게 다시 놓았고 그새 두 사람이 와서 앉았다.
“10년 전에 헤어진 연인이에요. 제가 20살 때 만난 첫사랑이었는데, 동시에 짝사랑으로 끝난 아주 표현하기 어려운 관계에요. 일 년을 만났지만 그 누구도 먼저 진지하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거든요.”
“저런, 왜 말하지 못했나…?”
J.P는 내 이야기가 궁금한지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마릴은 옆에서 그런 J.P를 보면서 가끔씩 미소지었고 물을 천천히 마시며 기다렸다.
“일 년 쯤 만나고 나서 그녀가 케냐로 떠났거든요.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이라고 했어요. 거기서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요. 저보다도 네 살이 더 많은 그녀는 대학 졸업 후 바로 케냐로 떠났어요.”
“오 이런, 그래서 여태 그리워하며 살았던겐가?”
“아니요, 당연히 어린 시절의 저는 금방 잊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아주 바쁘게 살았죠. 이후 십 년 동안…….”
“그런데 갑자기 그녀를 찾게 된 이유가 있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가끔은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아가거든요. 누가 막 등떠밀 듯이 일어난 일들이라서요. 정말 뭐라 설명할 수가 없어요……. 한국말로도 이건 설명이 안 돼요.”
“아무래도 신이 너를 이 길로 인도한 것 같구나.”
J.P는 확신해 찬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조금 불편했으나 나의 가치관까지 구구절절 설명할 만한 영어실력은 되지 않았다. J.P는 옆에 있던 마릴에게 무언가를 한참 설명했다.
“아참, 마릴은 영어를 하지 못한다네. 대신 내가 독일어를 좀 하지….”
“두 분은 부부인가요?”
“아니! 우리는 작년에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사이라네.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순례길을 걷기로 약속했지.”
“와, 대단해요!”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내가 혹시라도 잘못 해석한 게 아닌가 싶어 몇 번을 곱씹어 보았지만 J.P는 타자기 치는 시늉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
“사랑의 힘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그래서 그 ‘별’이라는 여자는… 찾을 수 있나?”
“알베르게나 레스토랑이나, 보이는 곳이든 가게 되는 곳이든 가서 그녀를 물어봐야지요. 순례자 사무실에서는 아무도 기억을 하지 못했어요.”
나는 J.P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J.P는 그녀 옆에 있는 B.M을 짚으며, ‘이 여자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하고 장난을 쳤다. 나는 노! 하고 소리치며 옆의 여자 얼굴을 짚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목이 드러나는 시원한 단발머리. 깊은 눈망울은 여전했고 당장에라도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벌일 것 같이 실룩거리는 광대, 그리고 그 위로 은하수처럼 뿌려진 주근깨. J.P가 사진을 유심히 보는 동안 나 또한 다시 한번 그녀의 모습을 새겼다.
“나도 마릴과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왔지만 아무래도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그럼 뭐 어떤가! 이제 막 이야기의 시작인데 벌써 끝이 나면 재미가 없지!”
J.P는 종업원을 불러 나의 파스타 까지 계산을 하고는 마릴과 짐을 챙겼다.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좋은 기운을 받은 댓갈세. 시간이 허락한다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부엔까미노!”
J.P와 마릴은 찬찬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등산스틱을 열심히 저어가며 두 사람은 어느덧 생장의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