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네를 넘는 일은 순례길을 시작하는 나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다.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며, 앞으로 삼십 일이 넘는 날을 이렇게 걸어야 한다는 것에 순간 후회마저 들었다. 어제 J.P와 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별을 찾아 산티아고 순례길에 왔다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J.P에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J.P는 800km를 걷기에는 조금 무모해보이는 신체를 가진 노인이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일흔 살이 넘어 긴 거리를 걷는 일이 과연 쉬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아니라면 나의 오만이고 편견일까. J.P와 마릴은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사이라고 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마릴은 다소곳이 앉아 미소만 짓다가, J.P와 대화할때는 거침없이 말이 많아졌다. 어쨌든 다시 한 번, 일흔 살이 넘은 남자가, 인터넷 채팅으로 비슷한 나이 때의 독일 여자를 만나,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약속하고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나는 갑자기 귀인을 만난 것처럼 어제의 일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J.P와 만난 것이 직감적으로 대단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야기를 꺼냈던거야!’
또 마침 우린 같은 날짜에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 등 여러 가능성을 더해가자, 온 우주를 뒤져 찾은 귀한 인연인 듯 J.P에 대한 감정이 깊어갔다. 다음에 만나면, 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눌까 기대도 되었다. J.P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피레네산맥을 넘어가는 경사로가 주는 고통이 경감되었다. 아침 이슬을 머금을 풀을 뜯기 위해 말이나 양, 소 같은 가축들이 초지로 나왔다. 나는 그 자유로움이 신기하면서도 경이로웠고, 휴대폰을 켜서 사진을 몇 장 담았다.
오리손 산장에 도착해 짐을 풀고 물을 보충했다.
별은 한 때 나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신이 나서 설명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호야, 너 산티아고 순례길 알아?"
"순례길이요…?"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 800Km정도 되는 길. 프랑스 국경에서부터 시작하는 길. 그러니까 수호성인이 또 뭐냐하면……. 그녀는 우리가 주로 데이트했던 서점에서나, 호프집에서나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에 대한 전반적인 묘사가 끝난 후에는,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그들이 얼마나 큰 각오와 결심으로 길을 걸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얻어갔는지에 대해 열띤 의논을 했다. 이십 대의 어린 나는, 무언가 대단히 큰 것만을 이야기했고. 그녀는 아주 작은 변화에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의 이면엔 항상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그녀가 말하고 싶던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아주 어렵게 다가왔다. 사랑의 의미는 넓고 깊어서, 단어의 포용력으로만 보면, 그녀의 말은 사실일 것이라 생각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길이야. 아직 걷지 않았지만, 언제가는 반드시 걸을 길이고. 그때는 위해 아껴두고 싶어. 아주 소중히……. 수호 너에게도 살아가다보면 한 번 쯤은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어. 이미 알아버렸잖아? 순례길이 얼마나 매력적인 길인지.”
그녀가 케냐로 떠난다고 했을 때 왜 산티아고 순례길은 가지 않는거냐고 물었다. 차라리 한두달 다녀오는 일이라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을텐데. 그녀는 수 년이 걸릴지도, 아니면 자신의 일생을 바칠 수도 있다고 확고하게 말했다. 그녀의 신념과 의지는 내가 가진 작고 깨지기 쉬운 사랑으로는 붙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 년 동안 지냈던 시간들이 물감 번지듯 흐려졌다. 그 이후에 나는 십 년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피레네의 탁 트인 정상 부근을 지날 때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잠시라도 머무르면 감기가 걸릴 것 같은 차가운 바람이었다. 나는 쉬기를 포기하고 전날 알베르게에서 포장한 샌드위치를 뜯어먹으며 길을 계속 걸었다. 피레네를 오르기 전에 지났던 ‘오리손’에서 물을 보충한게 도움이 되었다. 숙소가 있는 작은 바(bar)였다. 그곳의 종업원에게도 그녀 사진을 보여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다’뿐이었다. 길을 잃은 한 일행이 돌 무더기가 높이 솟아있는 곳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영어로 절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덕분에 옆에 난 길로 돌아 쉽게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어느덧 론세스바예스의 전경이 멀리 펼쳐졌다. 커다란 성당을 낀 하얀 외벽의 거대한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찾아본 바로는 이곳이 론세스바예스에서 유일한 숙소이고, 너무 늦게 도착하면 열악한 구 건물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데, 부지런히 걸어온 덕에 숙소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길게 늘어진 복도에 침대와 옷장이 나란히 놓여 있는 곳에서 나의 침대 번호를 찾았다. 2층 침대 중에 아래칸이었는데, 2층에 있던 외국인 여자가 자리를 바꿔줄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기 전에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발바닥이 욱신거렸고, 종아리 근육이 살살 아파왔다. 마을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빠르게 땀을 씻어내고 피로한 몸을 재우고 싶었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종아리를 살살 풀어주고 나니 잠이 스르르 몰려왔다. 아직 도착중인 순례자들과 이제 막 도착한 순례자들이 섞여 시끌벅적했다. 인터넷에서, 팁이라며 안대와 귀마개를 챙기라고 한 사람이 있었다. 그거 부피도 얼마 안 되고 걷는데 지장 하나도 없으니 그냥 챙겨나 보시라고…. 나는 그 얼굴 없는 천사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와 함께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