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공기가 차가웠다. 바람막이로는 충분히 감당하지 못할 추위였다. 그러나 걷다보면 이마저도 더워서 다 벗어버릴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알베르게를 지키는 직원이 바뀐 걸 확인하고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며 본 적 있느냐 물었다.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알베르게를 조용히 빠져나와 윤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다. 쌀쌀한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 온 몸을 천천히 스트레칭했다. 잠시 후 윤의 모습이 보였다. 어두웠지만 키가 큰 실루앳이 딱 봐도 윤이었다.
“미카가 잠이 많아서 못 일어나더라…. 아주머니가 이따가 일어나면 같이 걷겠다고, 먼저 가서 가능하면 두 사람 침대만 더 잡아달라고 했어.”
“사방이 캄캄한걸 보니 좀 이른 거 같기는 해요.”
“그럴줄 알고 랜턴을 챙기긴 했어. 한시간 정도만 이렇게 걸으면 해는 금방 뜰거야.”
윤의 랜턴에 의지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사방이 캄캄한 어둠이라 중간중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리는 비석을 찾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길은 대체로 쉬운 편이었다.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만 의지해서 걷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경험이었다. 걸으면서 몸에 열이 올랐고, 금방 몸이 풀렸다.
“아주머니랑 미카는 어떻게 만난거에요?”
침묵을 깨고 내가 먼저 물었다.
“첫날에 오리손에서 마주쳤는데, 그때는 셋이 다 따로 걷고 있었어. 아주머니랑 이야길 하다가 어린 학생이 걷고 있는데 한국사람 같다고 같이 가면 좋겠다고 하길래 말을 걸었더니 일본인이더라고. 아주머니가 뭐 그리 가방에 과일을 싸오셨는지 나눠먹고 걷다 보니까 같이 론세스바예스까지 오게 됐어.”
“형은 혼자 걸으려고 온 거 아녜요?”
이곳을 홀로 걷겠다는 건 분명 무슨 큰 의미가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딱히 그런건 아닌데…, 누군가와 같이 걸으려 했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 중에 누가 이곳을 같이 가려 하겠어.”
“생각해보면 그렇네요…. 혼자 오기로 해도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길인데.”
“책에서 봤는데 신혼여행 대신 온 부부도 있고, 가족끼리 온 사람도 있고, 그정도 사이가 아니라면 쉽게 함께하기는 어렵지.”
윤은 랜턴으로 비석을 용케 잘 찾아가며 말했다. 우리는 가로등 불빛이 꺼지고 나서야 동이 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윤은 그제야 랜턴을 꺼서 가방에 넣었다.
“아주머니나 미카나 혼자 와서 내게 무척 의지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내가 더 의지를 많이 한 것 같아. 걷는 길이 지루하지도 않고, 함께하니 또 즐겁잖아.”
윤은 긍정적이었고, 처음 이미지와는 다르게 사교적이었다. 아주머니와 미카를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됐지만 그만큼 소중한 인연이었고 신경쓰는 듯 보였다. 우리는 작은 마을 가게에서 풍겨져나오는 커피의 향 때문에 잠시 멈춰섰다.
“카페콘레체! 도스!”
어쭙잖게 배운 스페인어로 내가 주문했다. 손가락으로 두 개를 표시하며 확실히 말했다. 어제 만들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크루아상도 두 개 주문했다.
“근데 너에 대해선 아직 물은 게 많이 없는데, 너는 어떻게 여길 오게 된거야?”
나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딱히 일에 얽매이지도 않는 편이구요. 어쩌다가 알게 됐는데 저도 이때 아니면 못 올 거 같아서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오고 나서 보자! 생각했어요.”
나는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야기를 풀어놓다 보면, 어느 순간 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아야 할 것이고 그것이 타인에게는 별거 아닌 일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별을 찾겠다는 나의 다짐과 결심은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단단했지만 아주 이성적으로 보았을 때는, 단 하루의 차이만 나도 만날 수 있는 확률이 무척 낮아진다. 그녀를 만나지 못할 확률이 더 높았고 그게 현실적이었지만 나는 길을 걸으며 그 생각을 최대한 하지 않기로 했다. 무조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걸어야만 이 길을 다 걷고 나서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나서 가게의 주인에게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려다 말았다. 우리는 다시 동트는 마을을 지나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배낭의 무게 때문에 서서히 발바닥이 조여왔고 숨은 거칠어갔다. 길은 언제나 정직하게 뻗어서 우리를 이끌었지만, 결국 길 위를 걸어 나가는 건 자신이었다.
*
“수호야 너는 꿈이 뭐야?”
별이 나에게 꿈을 물었을 때, 나는 스스로가 적잖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별은 상대방에게 낯간지러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누군가가 꿈이 무엇이냐 물으면 조금은 유치하고 낯간지럽게 느껴졌을 것이지만, 그녀의 질문은 내 마음속 꺼진 화로에 아직 불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아주 막연하겠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바다가 보이는 아주 작은 마을에 살면서 좋은 글을 쓰고 싶어요.”
“막연한건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는거야. 내가 봤을땐 오히려 소박해보인다.”
“누군가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글을 생각하는 제 마음은 항상 진지했고, 그래서인지 글은 언제나 어려워요. 정말 저에게는 막연한 꿈 같이 느껴져요.”
“그래도 할 수 있을거야. 네 꿈이 좋다.”
별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밤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가볍게 맥주를 마시면서 별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에서 진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바른 방향으로 다그칠 수 있다는 것. 그런 삶에서의 학습이 자신에게는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나 어려웠다. 대신 이야기를 할 때 상기된 그녀의 붉은 볼을 보며 순간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임을 느꼈다. 우리는 차가 끊기기 전까지 아주 오래오래 걸었다.
*
“공립 알베르게로 가는 게 좋을까?”
“주비리에도 공립 알베르게가 있나요?”
우리는 아르가 강 옆을 지날 때, 경치가 좋아 잠시 쉬기로 했다. 허리춤까지 올라오는 강 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낚시를 참 좋아했다. 아버지 생각이 나려고 했다. 나는 다시 윤에게 말했다.
“주비리에 가서 괜찮은 알베르게가 있으면 그냥 거기서 쉬어도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좀 일찍 출발해서 아마 어디든 자리는 있을거에요.”
“그래 그편이 더 낫겠다. 아직 강물이 차갑지 않나?”
윤이 낚시하는 사람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를 의식하고 있었는지 낚시꾼도 손을 흔들었다. 윤은 몸을 떨며 다시 배낭을 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찬 공기가 바람이 땀을 식히며 괴롭혔고, 걸으면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고 그 통증이 고스란히 발바닥에 집중됐다. 오래 걷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침 일찍 걸은 덕분에 우리는 금방 주비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햇살을 잔뜩 머금으며 아르가 강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반가움에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열두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