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팜플로나까지 20km (2)

by See Oak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주비리에서의 너른 잔디밭은 금방 잊혀졌다. 팜플로나의 좁은 골목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관광객도 있었지만 대부분 현지인들 같았다. 그들은 대낮에도 벌써 맥주병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서서 이야기했다. 한 무리의 사내들은 스페인 축구팀 응원가를 부르며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갑자기 말했다. 유명한 버섯요리집 앞에서 줄을 서 있던 아주머니와 미카, 윤은 나를 쳐다보았다.

“여긴 유럽이잖아요?”

“그게 왜? 수호?”

미카가 물었다.

“그러니까 이피엘(EPL : 영국 축구 리그)이나 라리가(스페인 축구 리그)를 제 시간에 볼 수 있는거잖아요!”

나는 흥분해 말했다. 나는 해외축구 광팬이었다. 학창시절 박지성 선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이후로 유럽 축구에 급격히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 독일의 어느 구단의 팬이 되었고, 그당시 감독이 이적하는 팀을 따라 함께 응원하곤 했다. 대체로 새벽 시간대라 제대로 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주말이면 시간에 상관없이 좋은 경기를 즐겨보았다. 아주머니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미카는 별 대단한 일도 아닌데 호들갑이라는 듯이 다시 버섯 요리 구경에 매진했다. 윤도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축구 좋아하나보네?”

“네, 근데 순례길만 생각했지 이곳이 스페인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양송이 버섯의 중앙에 베이컨과 다진 야채를 넣고 철판에 구운 버섯요리는 빵과 잘 어울렸다. 레몬 맛이 나는 맥주와 함께 먹고 거리로 나와 다시 타파스 집을 둘러보았다. 양송이버섯 몇 개로는 배가 찰 리가 없었다. 타파스 집에서 괜찮아보이는 타파스 몇 개를 먹고나니 배가 슬슬 불렀다. 저녁엔 알베르게의 주방에서 다시 파스타를 하면 되겠다고 아주머니가 말했다. 윤의 배낭엔 어제 해먹고 남은 파스타면과 올리브유가 있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윤은 낮잠을 좀 잤고, 미카는 누워서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계속 끄적거렸다. 나도 잠시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주머니는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거리를 조금 더 둘러보는 것 같았다. 두어 시간쯤 흐르니 날이 어둑해졌다. 아주머니가 돌아오고, 저녁으로 파스타를 해서 나눠먹었다. 미카가 아직 시간이 많다면서 거리로 나가자고 했다.

“한국분이세요?”

팜플로나의 거리를 둘러보다가 별안간 나에게 말을 건넨 건 다름아닌 한국인 여성 두 명이었다. 미카와 아주머니는 이름모를 축제 중인 분위기를 만끽하기 위해 축제 대열을 따라다녔고, 나와 윤은 근처의 맥주집에서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두 여자는 조금 눈치를 보는 듯 했다. 두 여자를 따라 스페인 남성 두 명이 따라왔다.

“좀 도와주세요…….”

한 여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두 명의 남성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두 명의 남성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두 여자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일행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두 명의 스페인 남성은 어깨를 으쓱, 하더니 몸을 돌려 다시 거리로 사라졌다.

“어휴. 감사해요….”

모자를 푹 눌러쓴 검은머리가 긴 여자가 먼저 말했다.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는 겁에 질렸는지 약간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나와 윤은 대략 상황을 파악했다. 스페인 남성 두 명이 치근덕거렸고, 좀처럼 뿌리치려 해도 집요하게 따라온 것이다. 두 여자의 자초지종이 우리의 생각과 일치했다.

“혹시 순례중이세요?”

윤이 물었다. 두 여자는 그렇다고 했다.

“일단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같이 맥주라도 마시러 가요. 저희도 순례중인데, 이 친구가 축구 경기를 보고 싶어서 맥주집에 가던 중이었거든요.”

나는 윤이 여성에게 의외로 능숙하게 말을 거는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그게 윤의 진짜 모습중 하나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축구경기를 보는 스페인 현지의 분위기가 당장의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에 누구와 함께 가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좋아요, 일단 가요.”

긴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바의 내부는 이미 만석이었고, 거대한 텔레비전 화면이 있는 가게는 외부까지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서서 자리를 잡았다. 윤과 내가 맥주 네 잔을 들고 나왔다.

“저는 윤이고, 이 친구는 수호라고 해요.”

“저는 박하은이에요. 이 친구는 김선아라고 해요. 둘 다 스물 일곱 살이에요.”

긴 생머리의 여자가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옆에 있던 선아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인사했다. 나는 나이를 확인하고는 약간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윤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로 윤은 크게 개의치 않았고 딱히 누군가에게 호감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윤은 두 여자에게 제안했다.

“저희가 어제부터 어떤 아주머니와, 일본인 소녀와 같이 걷고 있었거든요. 내일은 아마 푸엔테 라 레이나 까지 걸을 것 같은데, 일정 맞으면 같이 가시겠어요?”

방금 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인지 두 여자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좀 풀렸는지 선아는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근데 알베르게에서 못 본 거 같은데 어디서 쉬세요?”

내 물음에 하은이 대답했다.

“저희가 조금 늦게 출발해서 공립알베르게 자리를 못 잡았거든요, 급한대로 다른 곳으로 가서 자릴 잡았어요. 별로 좋은 곳은 아니라.”

“그럼 내일 일곱 시 정도에 출발할건데 여기서 만날까요?”

선아와 하은은 좋다고 했다. 축구경기가 시작되고 곳곳마다 축구를 보는 사람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퍼레이드 행렬도 지나가서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아주머니와 미카가 퍼레이드를 따라다니다가 내가 있다는 바에 도착했다.

“아이고 맥주 시원하겠다! 나도 한 잔!”

아주머니는 카운터로 가서 투, 비어! 투 비어! 했다. 미카가 옆에서 차분히 영어로 설명했다. 나는 축구에 푹 빠져서 현지의 생생한 열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선아와 하은은 윤과 조금 대화하고 아주머니와 미카와 만나 인사했다. 미카는 비슷한 나이대의 언니를 만나 반가워했다. 선아와 하은은 미카가 귀엽다며 금방 친해졌다. 내일 다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오래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우리는 다시 만날 장소를 확인하고 헤어졌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에 윤에게 말했다.

“형, 되게 적극적이던데요? 두 분한테?”
“나도 몰랐는데, 순례길을 걷다보니 나는 여럿이서 걷는 게 좋더라구… 그냥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런가봐.”

그리고 윤은 또 말했다.

“그렇다고 모두가 같이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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