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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련나무 Oct 17. 2023

떠오르는 대로 그냥 쓴 글   

그냥 막 쓴 글  

바람을 타고 잘 구워진 오전 9시의 가을 공기가 내 코끝을 스친다. 


어플로 부른 택시가 도착했다. 날이 참으로 좋은 가을이다. 이 가을은 아침엔 웅크리고 있다가 점점 따뜻한 날씨로 기지개를 켰다가 다시 어둠이 오면 지친 몸을 뉘인다.


가을의 하루에 맞추어 옷을 고르다간 결정장애가 생긴다. 결국 도로는 여름옷, 가을옷, 겨울옷이 한데 뒤엉켜 걷고 있다.


신호 대기를 하는 사이, 차창 밖엔 다른 차의 배기통에서 나오는 연기가 햇빛에 맞닿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바라보노라니 시간이 더디 가는 것 같다. 여기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아지랑이 같은 그 연기만 움직인다.  


햇빛은 그렇게 도시 구석구석을 물들이고, 낮이 되어 더 강렬한 색을 더해주고,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불 꺼진 영화관처럼 도시를 만든다.


택시에서 내려 다시 잘 구워진 그 가을 공기가 다시 내 허파에 들어온다. 9시의 공기는 크로와상이었다면, 10시의 공기는 베이글일까. 아마도 아침 7시의 공기는 식빵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계속 구워진 공기는 단단해져 낮이 되면 와플 같고, 오후가 되면 타르트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밤이 되어 폭신한 카스테라가 되어 우리는 포근한 그 공기를 덮고 잠을 청하겠지.


잠시 어느 건물에 들러 처리할 일을 보고 다시 거리로 나온다. 햇빛이 얼마나 공평히 모두에게 색을 입히는지, 도로에 있는 작은 흙더미에 핀 꽃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노란색, 자주색, 보라색, 주황색, 작고 정교히 세공된 그  꽃잎들이 얼마나 촘촘히 쌓여 있는지, 그렇게 하나하나 공들인 신의 작품인 그들이 도로에는 그저 그렇듯 무심히 있다. 햇빛은 놓치지 않는다. 그들을.


큰 상점가에는 여러 사람들이 오늘도 여지없이 걸음을 옮긴다. 양복을 입은 사람도, 편한 트레이닝 복에 단색 반팔티를 입은 젊은이도, 그리고 그레이 진에 베이지 색 티셔츠를 입은 나도 모두가 각자의 목적지로 걸음을 옮긴다.


그들의 모습에서 언젠가 학생이었던 내가, 언젠가 직장인이었던 내가, 언젠가 미래를 알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내가, 그리고 아직 되어보지 못한 아이 엄마가, 그리고 미래에 만날 좀 더 나이가 들어있을 내가 떠올랐다 사라진다.


거리 속에서 여러 명의 나를 만나다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 잠시 숨을 고른다. 지나가는 한 명, 한 명이 다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고 걷고 있음을 느낄 때, 이 세상은  많은 이야기로 꽉 차있 마음이 벅차오른다.


걷다 보면 쓰고 싶은 표현이, 그리고 싶은 그 무언가가 자꾸 마음속을 쿡쿡 찌른다. 마음을 잠재워 보고 다독여도 본다. 도대체 뭘 쓰고 싶은 거니 너는. 좀 더 여물 때까지 완벽해질 때까지 넌 기다릴 여유가 없니..


자꾸 글을 쓰고 싶은 건 어떤 욕망일까. 정말 내가, 내 마음이 원하고 있는 건 무엇일까. 나는 책을 내고 싶은 걸까,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싶은 걸까, 그냥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걸까.


글을 쓰는 내 마음이 매우 산란하다. 그러다 보니 내 글들은 여러 개의 정체성으로 뭉쳐져 굴러다니고 있다. 에세이인지, 소설인지, 일기인지, 정보성 글인지 나도 모르겠다.


브런치스토리에 처음 가입할 때, 작가로 신청하고 되었을 때, 중간에 자극적인 제목으로 조회수가 올랐을 때, 다른 사람들의 글에 마음에 여러 감정들이 왔다 갔다 했을 때, 라이킷과 구독 수를 조회할 때, 여러 순간들의 나는 분명 매번 달랐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나는, 쓰고 싶어서 쓰는 글에서마저도 이도저도 아니게 배회하고 있다. 커피를 마시고 차가운 얼음이 달그락 거릴 즈음, 서점으로 걸음을 옮긴다.


서점에는 아마도 만개는 족히 넘을 책들이 있다. 이 수많은 책들에는 수많은 가의 노력과 바람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작가의 염원 출판 관계자들의 공수 더해져 한 권 한 권의 책들이 서가에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얌전히 서가에 있는 것만 같은 그 책들은 서점에 역동적인 숨을 내어 뿜는다. 마치 운동선수들이 스타트 라인에 서있는 것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담은 연애편지가 연모의 대상자 앞에 놓인 것처럼.


난 당신에게 읽히고 싶어요라고- 온몸을 내밀어- 나의 세계를 집어주세요라고- 그들은 소리 없는 외침을 서점 곳곳에서 뿜어낸다.


예전에는 서점 입구에 소설이 가장 먼저 진열되어 있었다. 베스트셀러 소설들이 가장 먼저 반겼는데, 요새는 트렌드가 변했다. 입구의 메인은 돈이다. 부동산, 주식, 돈에 관한 생각, 그곳을 지나치면 그다음은 에세이가 나온다.


당신의 마음을 달래줄게요. 힘을 내요. 에세이가 있다. 그다음을 지나치면, 수험서, 정보서, 여행서, 요리서, 다이어트나 건강 서적이 나오고, 그 뒤에야 넓은 면적으로 문학이 나온다.


가끔 브런치 스토리에 올리는 나의 글들도 서점의 책들 같다. 글을 올리면, 얇은 종이 한 장쯤의 내 글이 가상의 서점에 꽂힌다.  글은 그 서점의 어디쯤에 있을까.


클릭되려면, 호기심을 자극할 강렬한 컬러의 제목을 넣어야 하고, 그 안에 내 글은 짧거나 적당한 사진을 넣어 글을 읽는 사람을 배려해주어야 하고, 라이킷과 구독을 얻으려면, 독자의 구미가 당기는 주제와 진심을 잘 풀어 넣어야 한다.


그런 면에선 난 좀 이기적이다. 난 그냥 내가 내키는 제목을 넣고, 글 길이도 배려감이 없고, 사진은 잘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걸 쓰고 있다. 정처 없이 서정적 글을 쓰다 갑자기 일기 같은 글을 쓰는 지금처럼. 난 글을 쓰는 이 공간에선 이기적이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조회수, 구독, 라이킷에 마음을 많이 풀었다. 역으로 내가 구독과 라이킷을 하는 것도 나름의 규칙을 가지게 되었다. 구독은 우선 되도록 자제하고 있다.


나는 알림이 오면 그 작가의 글을 모두 다 보려고 하는데 알림을 끄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고, 알림이 오면 어쨌든 본다. 모든 작가의 글을 다 구독할 수 없겠다 싶어서 이제 구독은 자제한다.


라이킷은 내 글에 라이킷을 달아준 작가님들 글에 보통 많이 달고 있다. 이유는, 내 글에 공감해 주는 그분들은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생각을 하는 분들인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분들의 글을 읽다 보면 라이킷을 누르게 되는 글을 만난다. 잘 써서든, 공감이 되어서든, 응원해주고 싶어서든, 그 이유가 설명 없이 라이킷 하트로 표시된다.


요새는 마치 예전 유럽(?)의 카페에 모이던 작가들처럼, 서로 작가들끼리 힘을 내어 글을 쓰게 독려, 응원해 주는 공간으로 브런치스토리 작용해주지 않을까 는 마음도 가져본다.


열심히 글을 쓰고 싶은 그 노력, 그 열정 활활 타오게할 라이킷의 기름을 부어본다. 따뜻하고 이로운 불이길 바라며 말이다.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 조회, 구독, 라이킷은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대가성(?) 기브 앤 테이크를 피하려 하고 있다. 브런치 글도 봐야 하지만 제 종이 페이지를 넘기는 아날로그의 도 봐야 해 시간이 부족한데, 그렇게 거래하는 느낌은 시간에게 미안하다.


브런치스토리는 아무래도 에세이가 인기가 많다. 그리고 특정 분야의 에세이 글이 가장 인기가 많다. 근데 나는 소설도 써보고 싶고, 독자층이 기없는 주제의 글도 그냥 쓰고 싶다. 그래서 조회수, 라이킷, 구독에서 나는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 나는 내 글을 좀 더 자유로이 쓸 수 있다. 쓰고 싶은 욕망을 누를 수 없다면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말이다. 그래도 내 글에 매력을 느끼는 독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이기적이고 자유로우려 해도 말이다.


나는 글을 통해 실제 만나지 않는 그분들을 만나고 싶은 바램이 있다. 마치 서점의 책들처럼 말이다. 그 만남을 통해 각자의 독자들과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간다.  글로 말이다.


이건 스토리의 확장이고 이해와 공감의 확장이다. 이건 전적으로 내 글에 매력을 느껴 글을 읽어주는 분들의 힘이 아니면 될 수 없는 일이다.


서점에서 나의 글쓰기는 무엇인가.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계속 헤매다, 결국 헤메임의 끝은 보지 못하고, 내 허리가 휘어질 분량의 책을 사서 이고 지고 집에 온다. "날 데리고 가서 읽어줘."라는 외침들 사이에서 간신히 몇 명만 데려온다.


얼마나 대책이 없는지, 이런 날은 꼭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집에 온다. 오는 길의 지하철과 버스에서 가방과 봉투가 찢어지게 담긴 그 여러 권의 책들을 빨리 열어보고 싶은 그 순간의 설레임이 가장 짜릿하다.


그리고는 또 책장과 책상 위에 책이 수북이 쌓인다. 이윽고 나와 함께 집에 온 그 들에 담긴 글들을 보면서 아직도 미숙한 나의 글들의 민낯이 내 마음에 떠오른다.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오는, 늦어서 미처 머리도 못 감고 세수도 안 하고 길거리로 뛰쳐나온 나의 글들은 또 나오는 걸 망설이게 된다.


내 손에 들려온 출판을 거쳐 나온 그 글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단장이 되어 독자를 제대로 만난다. 준비된 모습의 만남은 헐레벌떡 민낯의 내 글이 무슨 만남을 원하는지 묻는다. 어디로 가는지 묻는다.


단장한 그 글들은 만난 독자에게 자신을 알린다. 적어도 백 페이지 가까운 그 책들은 자신의 모습을 속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만남은 각각의 독자에게 마음에 각각의 잔상을 남긴다. 그저 몇만 원의 책일 뿐인데- 그 책이 그렇게 그 글이 그렇게 책방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가을날도. 걷는 것도. 글쓰기도. 책도. 그냥 좋다. 이렇게 오늘 글의 정처 없는 배회의 마침표를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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