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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련나무 Oct 20. 2023

어느 여자의 오늘 오전 한 나절

몸을 풀어주는 체조 같은 글쓰기 하나

글을 안 쓰면 마음이 답답한 증상이 생겼다.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글을 안 쓰면 이 갑갑함이 가시질 않다가 나중에는 초조(?)해지기까지 해서 그냥 글을 써본다.


몸을 풀어주는 체조 같은 글이라 생각하자- 으쌰으쌰! 그럼 시이작!


새벽의 짙은 공기를 밀어내며 아침이 조금씩 밀려들어온다. 마치 팔레트의 물감을 묻힌 붓을 물에 타서 도화지에 찍었을 때, 그 색이 도화지에서 점점 번져나가듯 그렇게 아침이 모든 곳에 막을 수 없이 밀려든다.


아침이 밀려들고도 조금 더 지나 나는 집의 곳곳을 지나다니며 창문을 열어젖힌다. 우리가 잠자던 사이의 집안 공기와 밖에서 방황하던 공기들이 서로 만나는 교차점 어딘가에 새로 시작되는 하루가 있다.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베개도 한번 팡팡 두들겨 보고, 매트리스도, 이불도 돌돌이로 약하게 팡팡 치면서 먼지를 털어내 보고, 잘 개어 햇빛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놓는다.


세수와 양치를 간단히 하고 물 한 컵을 따라 마신다. 물이 컵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그 컵의 물의 내 목구멍을 타고 꿀꺽꿀꺽하는 소리에 내 몸에도 하루의 시작 시그널 소리가 들린다.


다시 열던 창문을 정리하고, 블라인드를 햇빛이 잘 들도록 정리한다. 약간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사과 조금, 커피 조금, 비스킷 조금을 꺼내 놓고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돌린다.


예전에는 이 시간 즈음에 너무 내 마음에 쏙 드는 홈쇼핑 방송이 잘 나와서 정신을 놓고 막 시청하고는 했는데, 어느 날서부터는 편성이 바뀌었다. 지갑부터 여는 아침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오늘은 청소기를 돌려보기로 한다. 청소기를 들고 구석부터 천천히 밀어 본다. 의자를 들고 책상 아래도 밀고, 방바닥도 윙윙 밀어 본다.


방문도 밀어서 문 뒤편도, 소파 뒤편도, 소파 아래도, 침대 주변도, 식탁 주변도, 옷걸이 주변도, 주방 곳곳도, 윙윙~ 청소기의 롤 스펀지 같은 브러시를 따라 강한 흡입력으로 붙어있던 먼지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그리고 현관도 정리해 본다. 사용도가 덜한 신은 밑바닥을 가볍게 정리해 선반에 올리고, 바닥에 모인 흙, 모래 등 정체 모를 신발과 함께 집에 온 반갑지 않은 친구들을 몰아내준다.


현관바닥이 반짝이고 신발이 적게 놓이면 집에 들어올 때, 마음이 부산하지 않아서 좋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신을 벗고 다시 가지런히 모아 나가는 방향으로 정리하게 된다. '나 집에 왔어요'라는 일종의 표식이다.


아침부터 의자도 들었다 놓고, 각종 가구 밑을 허리 굽혀 청소하다 보니 운동을 한 것 같다. 어제 먹은 저녁도, 오전에 먹은 작은 끼닛거리들도 이미 다 소화되고, 몸은 약간의 열기가 생긴다.


이제는 점심을 준비할 때다. 무엇을 먹어야 하나. 사실 직장인들만 점심메뉴가 고민이 아니다. 이건 모두의 고민이다.


얼마 전에 식당에서 비빔밥을 먹는데, 옛날 TV드라마 생각이 났다. 그때 단골 장면 중 하나는 늘 3대-4대가 어울려 사는 집에 있는 며느리의 야식이었다. 밤에 물을 마시러 잠시 나온 시아버지나 시어머니는 갑자기 공포의 소리를 듣는다. '슥슥-'


이윽고 이게 뭔가 가보면 주방에서 불도 제대로 켜지 않고, 양푼에 온갖 재료를 담아 냉장고 옆에서 고추장과 참기름을 쓱쓱 바른 비빔밥을 야무지게 먹는 며느리가 있었다.


며느리가 그 야식을 먹는 이유는 임신이던가, 스트레스던가 그랬던 것 같다. 지금 드라마엔 양푼도 잘 안 나오고, 밤에 비빔밥 야식을 먹는 며느리나 여자는 잘 등장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게 언젠가부터는 소주에 김치를 먹는 여자로 바뀌더니 요새는 그런 장면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 생각이 났는지, 메뉴는 생각보다 빠르게 선정되었다. 때마침 집에 시금치 무침도 있겠다, 콩나물 무침도 있겠다, 불고기도 있어서 밥에 반찬들을 큰 접시에 집어넣고 고추장에- 핵심은 참기름 한 수저! 를 넣고 슥슥 비벼 먹는다.


그 밤에 야무지게 그 비빔밥을 먹던 며느리가 얼마나 스트레스가 풀렸을지 이해가 된다. 이제야 말이다. 너무 맛있다!


설거지를 뽀드득뽀드득하면서 점심 식사의 흔적을 없앤다. 또 다른 식사를 하려면, 그전 식사의 흔적은 자리를 비워야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정리된 주방을 보면 괜히 혼자 뿌듯하다.


티도 안나는 열심히지만, 그래도 말끔해진 주방, 거기에 비빔밥으로 만족스럽게 잠재워진 나의 허기는 그 누구도 몰라줘도 나 혼자라도 나의 열심에 뿌듯해지는 꽤 만족스러운 순간을 가져다준다.


이 순간엔 뭐다? 커피다. 다시 점심의 졸음을 몰아내고 비빔밥의 여운을 가시게 할 커피를 마신다.


이렇게 오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 여자의 한 나절이 갔다. 그 이후는... 비밀이다. 그 여자도 비밀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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