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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련나무 Nov 06. 2023

천고마비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그 넉넉한 풍요로움 속으로  

오래된 표현-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그 계절. 들을 때마다 말이 아니라 내가 살찌네~ 생각하는 그 표현. 동 준비에 들어가는 곰처럼 갖은 양식을 몸에 저장하는 부지런함이라 위안하던 그 표현.


그래도 오랫동안 사용하는데 이유가 있어 다시금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그 표현이 바로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오늘은 가열차게 왔다가 잦아들었다 하는 비따라 햇빛도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비췄다 감췄다 하고, 그 와중에 한결같이 바람은 강풍이 부는 흔치 않은 날씨이다.


아마 비, 햇빛, 바람이 삼중주를 하고 있다면 지휘자는 어떤 곡을 연주하는 것일까. 궁금해지는 그런 날이기도 하다. 어제의 날씨가 서막이었다면 오늘은 2악장쯤 되는 것 같은데, 내일은 종지부인 3악장이 아닐까.


어제 약한 비가 추슬추슬 내리는데 JTBC마라톤이 열렸다. 외출 나가는 길에 마라톤 교통 통제 구역이 있어, 불편함이 있었지만, 옆에서 그 비를 맞으면서도 쉴 새 없이 다리 근육을 움직여 달리는 한 분 한 분을 보니,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뛰었다.


나도 모르게 차 창문을 내리고, "이팅!"이라고 소리를 한 껏 지르고 싶은 욕망이 생겼는데, 아줌마 훌리건으로 교통경찰의 제지를 받을까 봐 그 마음 꾹 참고 도로에 있었다.


가을의 깊음 가운데를 그렇게 달리는 그분들을 보면서, 천고마비의 계절에 저분들은 내딛는 그 한걸음 한걸음으로 말로 표현할 할 수 없는 감동의 것들로 자신을 채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쉼 없이 그동안의 노력을 이 순간의 완주를 채워가는 참가자 한 분 한 분이 가을의 멋진 한 날을 채워놓았다.


비바람에 낙엽이 길에 내려앉는다. 예전에는 가을 낙엽을 두고 어느 분이 편지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그때는 이해 못 했는데,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


나무속에서부터 겨울, 봄, 여름, 가을을 나면서 나뭇잎이 보았던 그 세계. 나뭇잎 하나하나가 가진 그 이야기들. 말로 하지 못해 초록으로, 노랑으로, 갈색으로 온 몸을 내어 색으로 그림을 그리었건만..


이제는 그 나뭇잎들이  간절히 자신의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비바람을 타고 길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편지가 길에 쌓여 늘어간다. 청소부는 무심히 그 편지를 수거해 가는 우체부이다. 너무 편지가 많아 이 가을에도 청소부는 구슬땀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지나가는 자동차 하나는 은행나무 옆에 주차를 했는지, 급히 나오느라 노란 낙엽을 잔뜩 차에 프린팅 해 도로를 질주한다. 진정한 가을 라이딩이다.


창문 밖으로 아직도 나뭇가지에 남아 있는 그냥 노란색이라 말하기에 부족한 더 깊은 노란색이. 깊은 사색으로 이끄는- 눈을 뗄 수 없는 그 노란색이 나무 위에도 아래에도 온통 세상을 그렇게 덮어버렸다. 비가 오는데도 하늘이 높다. 가을의 이 풍경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워 본다.


가을은 오래된 말에 독서의 계절이라고도 했다. 어쩌면 겨울의 차가움을 담은 달콤한 귤 옆의 책이 더 어울릴 것도 같지만, 시 한 편 읽어줘야 할 것 같은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라고도 했다.


옛날에는 은행잎, 단풍을 코팅해서 책갈피로 쓰기도 했었다. 그게 낭만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그 나뭇잎의 편지를 데려오지 못하고 잠자코 바라만 볼 뿐이다. 차마 데려올 수 없는 옛 추억인지도 모른다.


요즈음 서점에서 산 책이 많아서 그중에 몇 권을 읽었다. 예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를 다시 보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보았고, 김호연의 "불편한 편의점"을 보았다. 아직도 못 읽은 실용서적이 책장 가득 있지만, 가을은 소설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을 내어주었다.


황금 물고기는 아프리카 어딘가의 마을에서 출생한 것으로 생각되는 어느 여자아이가 납치되어 중동의 어느 집으로 팔려간다. 그 아이는 납치될 때부터 한쪽 귀가 멀었다.


출신지도 없고 부모님도 없는 그 아이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지만, 그 살아가는 여정은 만만치 않았다. 늘 제대로 된 신분증이 없어 쫓겨 다녔고, 돈도 없고, 그녀를 제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삶이 녹록 않았다.


그런 그녀는 문학과 음악으로 그 내면을 채웠다. 그녀는 그렇게 뭐 하나 제대로 가지지 못한 채 중동, 프랑스, 미국을 헤매다 아프리카에서 여정으로 소설책은 마무리 지어진다.


그 책을 두 번이나 읽게 된 건 작가의 서정적이면서 이국적인 표현들 때문이었다. 그 표현만으로 소설이 완성되진 않지만, 늘 읽을 때마다 난 그 소녀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나에겐 선호도가 들쭉날쭉 하다. 예전에 베스트셀러 였던 "상실의 계절"은 나에겐 너무 어려웠고, 마음에 담기에 힘이 들었다.


이번 작품은 벽돌 사이즈를 자랑하여 읽는데, 한 2주 정도 걸렸는데, 나에게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다. 내가 써보고 싶은 유형의 소설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읽으면서 좌절이 찾아왔다. 이 분이어서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뒤에 에필로그가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예전에 책으로 발행하지 않고 연재했던 소설을 드디어 제대로 완성한 글이라는 설명이다. 30대 초반에 쓴 글을 이제 70대에 접어든 완숙한 소설가가 다시 소설로 완성했다.


초현실적인 세계로 들어가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은 외롭다기보다 고독 그 자체를 즐기면서 교류가 적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럼에도 그 남자 주인공들은 초현실적인 세계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 생각을 하고 모험을 한다.


읽으면서 복잡한 현실적 그림이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리는 세계 안으로 몰입이 된다. 그 덕에 읽는 동안 글을 쓰기가 힘들었다. 글에 물들어 그 소설 속에 들어간 내 자신을 꺼내서 나만의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읽는 동안 즐거웠다.


벽돌책이고, 고독하고, 어렵기도 한 책이라 선뜻 추천은 어렵지만, 혹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쫒는 모험"이나 "1Q84"를 즐겁게 읽은 분이라면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그림자를 벗어놓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간다는 발상은 너무 신선했다.


불편한 편의점은 요새 유명한 히트작이라 말할 나위가 없다. 편의점이라는 친근한 공간을 놓고 다양한 소시민의 삶을 그려낸 이 소설은 재미없게 읽기가 힘든 책이다. 그리고 그 안에 특별한 악이 없다.


그 점이 이 책을 미운 사람도 완벽히 미워할 수 없게 한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보려는 노력이, 그래도 사랑하며 살려는 그 노력이 이 세상을- 완벽으로 설명할 수 없는 멋진 세상을 그렇게 어디선가 만들어 낸다는 걸 그려냈다.


독서로 살 찌운 내 내면이 건강하고, 이 가을만큼이나 멋지게 넓어졌기를 바라마지 않는 가을이다. 이젠 따뜻한 음료에도 제법 손이 가고, 뜨거운 국물 음식이 이열치열 하지 않아도 든든히 들어가는 그런 날이 가을이다.


진득한 추어탕에 부추 듬뿍, 산초가루 톡톡 해서 내 뱃속도 든든히 채워 가을 속에 안겨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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